지난 4·15 총선에서 세종시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김병준 전 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 전신) 비상대책위원장은 예상외로 얼굴이 밝았다. "37일 동안 선거운동을 하느라 체중이 5kg이나 빠졌는데 다이어트 효과가 나타나면서 건강은 오히려 좋아졌다"며 밝게 웃었다.
환했던 그의 얼굴은 선거운동 기간 중 느꼈던 얘기 보따리를 본격적으로 풀어놓으면서 '어둠 모드'로 들어갔다. 미래통합당에 대한 비호감이 예상 외로 너무 심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번 선거운동 기간 중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희망을 봤다"고 했다. 통합당이 놓치고 있던 '합리적 보수의 가치'만 잘 지켜나간다면 국민의 지지를 다시 끌어올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는 것이다.
- 심각한 지경이었다는데, 통합당에 대한 주민들의 인상부터 물어보자. 어느 정도였나?
▶처음 세종에 가서 우리 당 관계자들을 만날 때는 몰랐는데 직접 주민들을 만나기 시작하면서 "아 이거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구나"하는 것을 느꼈다. 길을 건너다가 우리를 보면 오던 길을 되돌아가는 사람도 있었고, 많지는 않았지만 차를 타고 가다 대놓고 욕을 하는 사람도 봤다. 그런데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당신은 싫지 않은데 당이 싫다"는 것이었다. 세종시에는 젊은이들이 많은데 그들의 시각은 이랬다. "정의와 공정을 저버린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싫다. 그런데 민주당에는 조국 같은 사람이 몇 명뿐이라면 통합당에는 거의 모든 구성원이 조국 같은 사람 아닌가" 이런 식이었다. 부패하고 타락한 정당이 통합당이라는 고정관념이 너무 강하게 박혀 있었다.
- 주민들의 반응이 그랬다면 선거운동 기간이 악전고투의 연속이었을 텐데?
▶선거운동 기간 중 당에서 공문이 날아왔다. 엎드려 큰절을 하라는 것이었다. 박형준 공동선대위원장에게 전화했다. 나는 사퇴한다고. 죄를 많이 지어서 사죄하는 큰절을 하라는 것인데 죄가 많으면 선거에 나가지 말아야지 왜 동정심에 기대나? 통합당은 툭하면 용서를 비는 상습범이다. 동정심에 기대는 지도부가 너무 한심해서 크게 화를 냈다. 큰절하는 통합당을 약자라고 생각하고 동정하는 유권자가 없다. 통합당은 줄곧 약자의 행태를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 통합당의 참패 요인 중 가장 큰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구닥다리당이라는 인식을 돌려놓지 못했다. 국민 마음속에 새겨진 '구닥다리=통합당'이라는 등식을 바꿔놓지 못했다. 그 중심에 황교안 전 대표가 있었다. 황 대표가 당내에 존재하면 박근혜 전 대통령과 자꾸만 연계된다. '탄핵의 굴레'에서 우리 당이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야당 심판론이 작용하면서 여기에 미래통합이 휘말려 들어갔다.
- 선거 참패를 계기로 황 전 대표가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렇다면 이제 탄핵의 굴레를 완전히 벗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탄핵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과 통합당을 연계시켜 보는 국민들의 착시현상에서 이제는 해방됐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기회다. 통합당이 제대로 된 이념과 철학, 비전, 가치를 갖고 있으면서도 이를 계승해오지 못했는데 이제는 그것이 가능해졌다. 이번 선거는 보수의 패배도 아니요, 우파의 패배도 아니었다. 통합당의 패배였을 뿐이다. 우리가 제대로 된 보수, 참된 우파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니 보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통합당을 외면했던 것이다.
- 통합당이 변한다면 보수 지지층이 다시 돌아온다는 말인가?
▶젊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은 진보도, 좌파도 아니고 대다수가 합리적 보수 우파였다. 자유민주주의의 가치와 자유시장경제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절대다수였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통합당을 경멸하고 있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물론, 정의와 공정의 가치를 내재화해보지 않은 정당으로 보고 있었다. 통합당이 합리적인 보수정당의 가치를 다시 계승하고 내재화한다면 우리는 절대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이런 점에서 이번 선거에서 비록 낙선했지만 나는 너무 큰 소득을 얻었다.
- 지지층이 다시 마음을 돌릴 것이라는 예측을 했는데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의 인기가 굉장히 높다. 그들은 여전히 강한 상대 아닌가?
▶우리가 넘어야 할 산이 있다. 지금 이 정부가 보조금을 뿌리는 정책을 마구 쓰는데 우리 논리를 갖고 대처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논리가 없었다. 국가가 아무 데나 개입하면 안 된다는 확실한 메시지를 내야 하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 정부의 돈 뿌리기에 대해 무조건 욕만 한다고 될 일은 아니다. 우리도 상생, 그리고 약자에 대한 보호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관한 입장과 대책을 내줘야 한다. 이 부분에는 국가의 역할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시장에서는 승자가 이기지만 나눔과 돌봄에서는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 줄 것은 주면서 정리해나가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왔다갔다 만 한다. 성장과 분배를 함께 가져가면서 매표 행위에 대해 이의 제기를 하고, 돈이 들어오는 성장의 구조도 만들어나가야 한다. 이 정부에 성장이라는 단어가 없다. 벌어가면서 써야지 그냥 막 쓰면 되나? 그런데 우리가 오락가락하니 통합당은 무조건 반대만 하는 당으로 낙인찍혀 있다. 성장에 관한, 즉 돈 버는 대안을 내면서, 국가가 상생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도 제시해야 한다.
- 문재인 대통령을 가장 잘 아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인데, 문 대통령의 지지율이 높은 이유는 뭔가?
▶선거 운동하면서 수없이 들은 얘기가 있다. "조국 전 장관이나 지금 경제 상황을 보면 문재인 정부를 심판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대안이 통합당은 아니라는 말도 따라다녔다. 통합당에 뚜렷한 대선주자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통합당의 집권 가능성이 보이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 대구경북(TK)은 이번 선거에서도 통합당에 대한 압도적 지지를 보였다. 그런데 통합당은 수도권 타령을 하며 지지 기반에 대한 존중과 예우가 부족하다는 목소리가 크다.
▶TK가 없었다면 보수 기반이 전멸했다. TK에 대한 평가를 절대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TK의원들은 좀 변할 필요가 있다. 공천권자 주변을 맴도는 몇몇 의원들의 행태는 이번 공천 과정에서 고쳐지지 않았다. 지역민들이 이런 행태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떨어뜨려야 한다. 우리 TK는 아부를 싫어하고 감언이설을 경멸하는데 의원 중 이런 행태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면 말이 되는 것인가?
- 비대위원장 선임을 둘러싸고 말이 많은데?
▶비대위원장에게 전권을 달라고 한다는 말이 있던데 전권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지금 비대위원장은 권한이 없다. 국회의원 공천권은 4년 뒤에나 주어진다. 당협위원장 임명권이 있긴 한데 당협위원장이 다음 총선에서 공천을 받는다고 장담을 못한다. 비대위원장은 참고, 설득하고, 중재하는 자리일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해주면…' 이라면서 자꾸 조건을 내거는데 그런 모습은 바람직하지 않다.
- 비대위원장 후보로 언급되는 김종인 씨가 젊은 대선 후보론을 들고 나왔는데?
▶40대 기수론이라고 하면 국민이 솔깃해하니까 해보는 소리일 것이다. 젊은 후보로 영국의 캐머런이나 미국의 오바마가 있었는데 그들은 오랫동안 지방의원, 그리고 다양한 정치활동 등을 거치면서 정치적 경험을 쌓았다. 우리 젊은 세대 중에 이런 경험을 쌓은 사람이 있나? 우리 상황은 외국과 완전히 다른데 이런 외국의 정치인들을 빗대서 말한다면 현실성도, 설득력도 없다. 그리고 비대위원장이 젊은 후보를 점지해보겠다는 투로 얘기하는데 지금이 왕조시대인가? 왕조시대에서조차 숱한 왕자들이 난을 일으키면서 점지에 저항했다. 점지해서 대선 후보를 결정하는 시대는 오래전에 끝났다.
-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있나?
▶나이도 있고, 세종에서 또다시 출마하지는 않는다. 지역 주민들께도 분명히 말씀드렸다. 그러나 세종에서 젊은 사람들을 계속 만나며 활동할 것이다. 떨어졌다고 바로 떠나는 것은 안 된다. 신의의 문제다. 1주일에 3일 정도 세종에서 머무르고 대구도 가고, 서울에도 있으면서 다양한 활동을 할 것이다. 전국을 다니며 강연도 할 것이다. 당 밖의 세력을 모을 것이다. 이들이 외부에서 당을 자극하고 새롭게 바뀌도록 만들어야 한다. 통합당의 원외 정치가 떠오를 것이다. 대권 후보들 상당수가 원외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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