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전쟁은 수백만의 죽음과 셀 수 없는 물질적·정신적 파괴를 가져왔다. 그러한 가운데 사회 전반에 많은 변화를 야기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전쟁을 피해 이동한 수많은 예술인들로 인해 새로운 문화 지형이 탄생하는 것이다. 3년간의 전쟁 중 대구의 인구는 46% 정도가 증가할 만큼 대구와 부산은 피란민, 월남인들이 유입된 대표적인 피란 도시였고, 이로 인해 지역사회 내부에는 많은 자극과 변화가 나타났다. 그리고 대구와 부산에는 전국의 많은 예술가들이 대거 밀집되어, 예기치 않게도 생존의 두려움과 궁핍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지적·예술적 욕구들이 발산되면서 많은 흔적을 남겼다.
1950년대 대구 화단은 전쟁을 피해 온 월남, 피란 예술가들과 대구화단 작가들과의 교류와 자극으로 왕성했던 모습을 보여주었다. 1951년과 1953년 사이 피란 온 허백련(1951년), 이상범(1952년), 박성환(1952년), 함대정(1953년) 등은 개인전을 열어 전쟁으로 고단한 사람들의 예술에 대한 갈증을 풀어 주었고, 다수의 월남, 피란 작가들은 대구의 작가들과 어울려 활동하였다. 1952년 창립된 '대구화우회'에는 서동진과 주경 등 대구의 작가들과 이상범, 윤경진 등 피란 작가들이 망라되었다. 또한 전쟁 중에 종군화가단의 전시 외에 가장 먼저 전시를 연 그룹은 1951년 향토작가 '유화 7인전'이었다. 이는 백락종, 박인채, 백태호, 김우조, 추연근, 이복, 민영식 등과 함께 찬조 출품한 손일봉으로 구성되었고, 그들은 전시를 통해 향토 미술의 건재함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당장의 생존의 문제가 급박한 전쟁의 와중에도, 이들이 예술 활동을 하게 한 동인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작가의 예술적 욕구도 있었겠지만, 이러한 회합을 이끈 이들의 취지에서 사회 구성원으로서 사명감, 예술의 사회적 역할 같은 것을 엿볼 수 있다. '대구화우회'전에서 주경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표식과 더불어, 민족의 저력을 조금이라도 보여줄 방법을 찾고자 하였고, 서동진은 전란으로 파괴된 물적 피해만큼 보이지 않게 거칠어진 인간의 심성을 무척 걱정하였다. 이들은 난리 통에 예술이 무엇에 필요한 것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회의를 가지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어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자존감을 잃지 않도록 예술 활동을 이어가려 하였다. 위기의 순간에 예술가들은 뭉치고 어떻게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행동하였다. 전란 중 부모를 잃거나 거리를 떠도는 소년들을 위한 여러 사회사업이 벌어졌을 때에도 서동진, 주경 등의 화가와 문인, 음악가들은 이들의 정서교육에 나섰다. 또한 1951년경 설립된 상고예술학원에서는 피란 온 문인이 중심이 되어, 지역 예술인들이 함께 6개월 과정의 음악, 미술, 문학 등의 교육을 하였는데, 지역의 유지가 운영비를 대고, 예술가들은 무보수로 강습을 해주었다고 한다. 비록 운영난으로 2여 년 만에 문을 닫았지만, 피란지에서 꽃핀 예술의 한 단면을 보여주었다.
박민영 대구미술관 교육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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