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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훈의 대구 옛 이야기] 민족주의자 최능진

대구 영남중 교사
대구 영남중 교사

일석(一石) 최능진(崔能鎭·1899~1951)은 평남 강서군 반석면 출신으로, 숭실중학을 졸업하고 미국 듀크대학 체육학과를 졸업하였다. 흥사단의 국내 조직인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안창호·조만식·조병옥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복역한 적이 있었다.

그의 형인 최능찬(1881~1932)과 최능현(1882~1933)은 반석면 상사리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최능익(1889~미상)은 미주에서 한인비행사양성소·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재미한족연합위원회·주미외교위원부에 참여하였다.

해방이 되자 최능진은 조만식의 평남건국준비위원회의 치안부장을 맡았으나 곧 월남하여, 1945년 9월 16일 경찰관 강습소장에, 동년 10월 21일 경무국 수사국장에 취임하면서 친일 경찰을 청산하는 데 앞장섰다. 해방 직후 경찰 현황을 기록한 미군정 보고서에 의하면, 경사급 이상 간부 969명 중에 83%인 806명이 친일 경력을 가졌던 경찰들이었다. 심지어 친일 경찰들이 미군정청과 우익 세력의 비호 아래 좌익 세력을 탄압하며 애국자로 둔갑하기까지 하였다.

1946년 가을 무렵부터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총파업이 10월 1일 대구에까지 확산되자, 당시 경무부장 조병옥은 이때 발생한 대규모 유혈 충돌 폭력사태의 원인을 '좌익 세력이 선동하고 일반 시민이 가담했던 폭동사건'이라고 결론지었다. 반면, 최능진은 공산주의자들의 책동에 의해 일어난 사건임을 인정하면서도 친일 경찰과 부패 경찰들이 쌀을 공출하는 바람에 시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하여 일어났던 사건이었다고 단언하였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조병옥은 최능진을 경무국 수사국장에서 해임시켰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각각 주석과 부주석을 역임했던 김구와 김규식은 남북협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5·10 총선거에 불참하였다. 남북협상에서 공동합의문을 발표하였으나, 5·10 총선거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이때 이승만이 동대문 갑구에 단독 입후보로 출마하자, 최능진은 민주주의 선거에서 이승만 박사만 단독 후보로 나서는 것을 막기 위해 도전장을 내던졌다. 그런데 유세 과정에서 민심이 최능진에게 기울어지는 현상이 나타나자, 서북청년단과 친일 경찰들은 중상모략의 방해 공작 끝에 선거 하루 전날인 5월 9일에 그의 후보 등록을 취소시켰다.

최능진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승만의 대항마로서 미주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서재필을 대통령에 추대하려는 운동을 벌여나갔다. 최능진은 서재필 대통령 추대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 서재필 박사 대통령 출마 요청서 100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하였으나, 돌연 서재필이 대통령 출마를 거부하며 미국으로 떠나자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곧바로 반민특위가 구성되어 민족 반역자를 단죄하여 민족 정기와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려는 움직임 속에서 최능진은 반민특위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이즈음에 수도경찰청장 김태선이 혁명의용군 사건을 발표하였는데, 최능진오동기 등이 남로당과 결탁하여 대한민국 정부를 무력으로 전복하여 공산 정권을 수립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의 눈엣가시였던 최능진은 재판 과정에서 자신은 동족상잔을 결코 원하지 않는 사람이며, 여순사건의 동기를 자신에게 전가하는 것은 천만부당하다고 항변하였다. 이승만 정부가 실체도 없는 혁명의용군을 조작하여 발표했음에도 최능진은 3년형을 선고받았다가 김구 암살 직후 옥중에서 단식투쟁을 했다는 이유로 징역이 5년으로 늘어났다.

최능진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지 6개월 만에 서울을 침공한 인민군에 의해 풀려났으나 평화통일과 정전운동을 주선하려 했다는 이유로 1950년 11월 특무대 김창룡에 의해 구속되어 1951년 2월 11일 달성군 가창면 파동에서 총살되었다.

2015년 8월 27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8부는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최능진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하였다. 제1공화국 집권 후반에 이승만의 경쟁 상대가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1898~1959)이었다면, 집권 초반에는 일석 최능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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