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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숙의 옛그림 예찬]화가 모름, ‘회혼례도’첩 중 혼례

미술사 연구자

19세기, 비단에 채색, 33.5×45.5㎝,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세기, 비단에 채색, 33.5×45.5㎝,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화가 미상의 '회혼례도(回婚禮圖)'첩 중에서 '혼례' 장면이다. 바탕이 조금 떨어져나간 부분이 있는 것은 아쉽지만 감상에 큰 지장은 없다. 결혼 60주년을 맞은 부부가 자손과 친지의 축하를 받으며 해로(偕老)를 기념해 결혼식을 다시 한 번 체험하는 회혼례의 주요 장면을 그림으로 남긴 화첩이다. 모두 다섯 면인데 1. 노(老) 신랑(新郞)이 기럭아비를 앞세우고 혼례 장소로 가는 장면, 2. 혼례식 장면, 3. 부부가 자손의 축하 술잔을 받는 장면, 4. 친지들을 대접하는 장면, 5. 주인공과 하객이 함께 가무를 감상하는 연회 장면 등이다. 4, 5는 남성들만의 자리이며, 연회 장면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악사들과 춤을 추거나 여흥을 돕는 기생들이 함께 그려져 있다. 회혼례만을 주제로 다섯 장면이나 그림으로 남긴 드문 예이지만 다른 기록이 없어 주인공이 누구였는지 궁금하다.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 자식을 결혼 시킬 수 있는 나이가 남자 15세, 여자 14세 이상으로 규정되어 있으나 더 이른 경우도 많았다. 평균수명이 지금의 절반이 되지 않았고 대를 이을 아들의 존재가 무엇보다 중요해 조혼(早婚)이 성행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회혼례는 어느 한 쪽이 아프거나 자식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일 없이 부부가 모두 70대 중반까지 건강하게 장수해야 치를 수 있었으니 흔한 일은 아니었다. 지금과 달리 결혼기념일이라는 개념은 없었지만 60주년인 회혼만은 중시했다. 잔치를 열어 아들과 손자의 효도를 자랑하며 친척, 친지들에게 가문의 위상을 드높였다. 지금도 회혼식이 치러지고, 결혼의 의미를 되새기는 리마인드 웨딩을 하기도 하지만 이 그림에서처럼 혼례의 절차를 고스란히 재연하지는 않는다.

'혼례' 장면을 보면 대청마루에 병풍을 둘러 예식장으로 꾸몄는데 정면에는 채색 모란병풍을, 왼쪽에는 묵매 병풍을 세워놓았다. 마룻바닥에는 4장의 긴 자리를 깔았고 신랑신부는 특별히 색색의 무늬를 넣은 꽃자리인 화문석(花紋席) 위에 서있다. 자리의 테를 파란색으로 두르는 것은 고려 때부터 전통이었던 것이 북송 사신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1123년)에 나온다. 마당에는 높이 차일을 쳤다. 신랑 쪽에는 남자들이, 신부 쪽에는 여자들이 둘러섰는데 갓과 머리에 꽃을 꽂은 분들은 노부부의 직계 자손일 것이다. 꽃은 초례상 좌우의 커다란 청화백자항아리에도 가득하고, 상 위의 음식도 상화(床花)로 장식했다. 기쁜 일에 꽃이 빠질 수 없는 것은 예전에도 그랬다.

꽃 항아리 옆에 붉은 촛불도 보인다. 결혼은 성씨가 다른 두 집안이 만나는 이성지합(二姓之合)이면서 두 성별이 일심동체가 되는 이성지합(異姓之合)으로 여겨졌다. 우주의 구성 원리를 음과 양으로 보았던 음양 사상에서 여성은 음, 남성은 양이고, 이성이 맺어지는 결혼의 시간은 양의 시간인 낮과 음의 시간인 밤이 만나는 황혼의 저물녘이었다. 혼례(婚禮)는 원래 해가 떨어지고 삼각(三刻) 후, 즉 45분이 지난 혼시(昏時)에 치르는 혼시성례(昏時成禮)의 혼례(昏禮)였다. 촛불을 켜놓고 치렀던 회혼례를 그대로 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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