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최재목의 아침놀] 패거리 짓는 욕망과 ‘거리두기’

최재목영남대 철학과 교수
최재목영남대 철학과 교수

'사회적' 거리두기가 '생활 속'으로 전환되는 동안, 나는 주변을 자주 걸으며 사소한 것들과 친밀해졌다. 어쩔 수 없을 때 '차나 한잔 들게!'로 뚫고 나가듯, 정처 없이 걷는 것도 좋았다.

5월의 하천, 샛노란 갓꽃이 한창이다. 그 위를 나는 검은 새들. 뭔지 모를 음산함을 느낀다. 아룬다티 로이는 소설 '작은 것들의 신'의 첫 문장에, 고향 땅 남인도 께랄라주 아예메넴의 무상(無常)을 필사해 두었다. "아예메넴의 오월은 덥고 음울한 달이다. 낮은 길고 후덥지근하다. 강물은 낮아지고, 먼지를 뒤집어쓴 채 고요히 서 있는 초록 나무에서 검은 까마귀들이 샛노란 망고를 먹어댄다." 검은 까마귀들을 샛노란 망고와 대비시키는 장면은 아름다우나 불길하다. 내가 본 갓꽃 위의 검은 새들도 그랬다. 노란-따뜻한 것을 갉아먹는 검고-차가운 것들 때문이리라.

"오늘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간다.…/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흰 바람벽이 있어')라고 백석 시인이 말했을 때, 나는 그가 '휙 지나가는' 시대의 얼굴을 목도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어서 말했다.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라고. 시인은 애써 불안을 지우며,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귀한 인간 존재들이,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든 '하늘'이라는 초월 세계를 슬쩍 설정한다. 참 아픈 대목이다.

'격리'가 '거리두기'로 오기까지, 전염병 방지의 '보건적' 전략은 '법적·정치적' 규제 형식으로 변환되었다. 죽음에 이를 위험한 전염병과의 사투는, 생명을 위협하는 적들과의 전쟁과 닮았다. 국민을 호출·동원하고, 분리·격리하며, 줄 세우고 편 가르는 기회로 삼는 점에서 같다. "세상에는 전쟁만큼 페스트가 많이 발생한다. 그리고 페스트나 전쟁이 찾아올 때 사람들은 언제나 무방비 상태였다"라는 카뮈의 언급처럼, 위기 상황엔 국민의 신체와 시공간은 무방비로 컨트롤당한다.

예전에 프라하에서 실로 매달아 조작하는 마리오네트를 본 적이 있다. 인형의 손과 발과 목은 줄로 연결되어, 섬세한 감정 심지어 영혼까지 조종당하는 듯하여 불편했었다. 합스부르크가가 프라하를 점령하여 독일어 사용을 강요했을 때 인형극만은 체코어로 상연을 허락했다고는 하나, 제어당하는 인형의 모국어란 얼마나 자유로운 것이었을까.

지역별 감염자가 숫자로 표시되는 코로나 환자의 증가율은 특정 지역을 구출할 기준도 되나 격리의 빌미도 되었다. 처음 '격리'란 말이 유행할 때, 나는 몇 해 전 소록도에서 보았던 '수탄장'(愁嘆場)을 떠올렸다. 격리 수용된 어린 한센병 환자와 부모가 면회할 때, 감염을 이유로 일정한 거리에서 2열로 늘어서 서로 쳐다보며 눈물만 펑펑 쏟고 헤어져야 했다. 그런 형식을 만드는 자들은, 분리의 선도 긋고 동시에 만남의 자리도 주선한다.

분명 우리가 가고 싶은 땅은 분열이 아니라 화합의 땅이나, 애석하게도 이 둘은 서로 붙어 있다. 나는 문학평론가 김현의 글을 인상 깊게 기억한다. 나쁜 폭력은 전면적이지 않고 부분적이며, 항구적이 아니라 일시적이다. 그것에서 벗어나려면 나쁜 폭력이 없는 초월 세계로 들어가면 된다. 그 초월 세계는 어디 있는가? 이 지상에서 그런 초월 세계를 만들려고 하는 네 마음속에 있다.

그렇다면 나쁜 폭력을 낳는 욕망이 바로 초월 세계를 낳는 욕망이 아닌가. 나는 그렇다라고 대답하고 싶다.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무섭다. 그 욕망이 바로 초월 세계를 낳는 욕망이다. 황석영식으로 말하자면, 가장 천한 것들이 가장 강하게 욕망한다. 분열시키는 자는, 그런 폭력으로 초월의 세계도 만들고자 한다. 무섭도록 다 가지려 한다.

'거리두기'는 '가장 천한 것들이 가장 강하게 욕망하는' 저 맹목적 패거리로 양분된 세상과 멀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길을 개개인의 양심과 자유로 연대하며 걸어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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