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월의 흔적] <63> 안채와 사랑채

백불고택
백불고택

옻골에 가면 백불고택(百弗古宅)을 살펴볼 수 있다. 옻골은 경주 최씨 20여 호가 동족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는 대구지역의 이름난 반촌이다. 그 집이 백불고택이라 불리는 것은 최흥원이 백 가지를 알지 못하고 백 가지에 능하지 못하다는 '백부지 백불능(百弗知百弗能)'이라는 옛말을 빌려 자신의 아호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 집은 대구지역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양반 가옥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61호(2009. 6. 18)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가옥은 안채,사랑채,재실,별묘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1694년에 지었고, 재실인 보본당(報本堂)은 1742년, 별묘(別廟)와 가묘(家廟)는 1896년, 그리고 사랑채는 1905년에 각각 지었다. 안채는 가운데 있는 넓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부엌,곳간 등이 쪽마루로 이어지는 'ㄷ'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 뒷날 증축한 'ㅡ'자 형태의 사랑채와 합해 'ㅁ'자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이 같은 주거 배치는 종가로서의 공간이 깊어짐에 따라 경건함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남자들의 공간인 사랑채는 외부로 개방하고, 생활공간인 안채를 'ㅁ'자 형의 폐쇄 공간에 배치한 것은 내외법(內外法)에 따른 배치라 하겠다.

'예는 부부간에 서로 삼가는 데서 시작된다. 집을 지을 때는 내외를 구분하여 남자는 바깥에 여자는 안쪽에 거처하되 문단속을 철저히 한다. 남자는 내당에 들지 아니하고, 여자는 밖에 나가지 아니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예기(禮記)"에 있는 말이다. 그에 따라 여자는 안채에서, 남자는 사랑채에서 지내는 것이 불문율로 자리 잡았다. 또 사내아이가 일곱 살이 되면 어머니의 품을 떠나 사랑채에서 할아버지의 훈도를 받으며 글공부를 하였다. 그리고 여자아이는 안채에서 글공부와 바느질을 익혔다.

'옛 풍속에 따르면 안채가 넓고 바깥채가 낮고 작으며, 별다른 시설이 없으므로 중국의 이름을 따라 사랑(舍廊)이라 불렀다. 그러나 지금은 사랑채가 더욱 넓고 크므로 사랑이란 이름은 합당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였다. 정약용이 쓴 "아언각비"에 있는 말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조선 후기에 이르러 사랑이 급격하게 비대해지면서 하나의 독립된 건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안살림과 바깥살림이 구분되어 있었다. 특히 집안을 다스리고 재산을 관리하는 일을 여성 고유의 영역으로 인식하여 남성이 관여하지 않았다. 당시의 사대부 남성들은 관직생활이나 유배 등으로, 민서들은 직역이나 군역 등으로 집을 떠나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가정의 실질적 주인은 여성이었다. 마침내 '안 사랑채'라고 하는 여성 전용 사랑채까지 등장하였다.

그 배경에 대해서는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먼저 여성의 역할과 신분이 크게 신장되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조선 후기의 가정은 오늘과 달라서 식구가 많았고, 일부 부농의 경우 노비를 거느리기도 하였다. 또한 음식이나 의복 등을 집에서 자급자족하였기 때문에 가사 노동은 그 중요성이 지금보다 더했다. 그런가 하면 사랑채를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도구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아직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가 남아 있다.

김 종 욱 문화사랑방 허허재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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