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기억이다. 그리고 기억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현재의 요구에 맞춰 끊임없이 첨삭, 변형, 왜곡, 미화된다. 그래서 한 시대의 지배적 역사상(歷史像)은 후대에는 전혀 다른 역사상으로 대체된다. 이런 기억의 가소성(可塑性)을 미국 역사학자 데이비드 텔렌은 이렇게 정리한다.
"기억의 (따라서 역사의) 형성은 역동적인 과정이며, 그 과정은 대개 현재의 필요성에 봉사한다. 그것은 새로운 정보가 흡수되면서, 새로운 가치와 맥락이 특정한 시대에 부각되면서, 우리의 정체성이 바뀌면서, 우리가 다른 지향성을 가진 새로운 집단과 관계를 맺으면서, 우리의 역사 기억을 다시 빚어내겠다고 결심한 다른 권위들이 우리에게 작용하면서 끊임없이 빚어지고 다시 빚어진다. 그것은 선택적 기억의 과정이면서 망각의 과정이다."
세계 역사는 이를 보여주는 사례들로 가득하다. 나치의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에 대한 이스라엘인들의 '기억'의 변화도 그런 예다. 이스라엘 건국 초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희생자들을 '비누'라고 부르며 멸시했다. 비누란 유대인 희생자 시신에서 나온 기름으로 비누를 만들었다는 소문에 빗댄 '하찮은 존재'라는 의미다. 그들은 희생자들을 저항도 않고 순순히 끌려가 죽임을 당한 어리석은 존재로 기억했던 것이다.
이런 '기억'은 1961년 홀로코스트 전범 아이히만 재판을 계기로 '변형'된다. 세계 여론이 희생자에 대한 동정으로 쏠리자 이스라엘인들은 자신들을 '비누'와 동일시했다. 이렇게 형성된 집단적 희생자 의식은 1967년 제3차 중동전(일명 '6일 전쟁')으로 더욱 강화되면서 윗세대의 홀로코스트 경험은 당대의 경험으로 전화(轉化)됐다.
"일본군 위안부 단체에 이용당했다"는 이용수 할머니의 발언을 정의기억연대와 여권 인사들이 '기억의 왜곡'으로 몰고 있다. 심각한 자기부정이다. 위안부 강제 동원 및 운영을 입증하는 자료의 부재를 이유로 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일본 정부에 대한 정의연의 반박 논리의 핵심이 위안부 할머니들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기억의 왜곡'이 맞는다면 지금까지 정의연은 '왜곡된 기억'에 홀려 허깨비를 좇은 것이 된다. '치매 노인' 취급으로 성금 유용 의혹을 부인하려다 자초한 자승자박(自繩自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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