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본당 시절
성직의 길에서 추기경이 가장 행복했던 때는 가난한 신자들과 눈물과 웃음을 같이했던 본당 신부 시절이었다. 두세 해에 불과한 안동과 김천에서의 본당 생활은 꿈처럼 아름다웠다. 후일 그 시절 신자들이 찾아오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추기경 때에도 돈 많고 힘 센 사람들보다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초대가 더 편하고 기뻤다.
너무 빨리 출세한 사람만이 느끼는 불편함과 외로움이 적지 않았다. 문고리까지 아랫사람들이 열어주는 추기경의 하루하루가 편치 않았다. 법정 스님에게 털어놓았다. "다시 태어나면 추기경 같은 직책은 맡고 싶지 않다. 그냥 평신자로서 살아가고 싶다." 교구장 시절 시골 본당으로 발령 난 후배 신부들이 달갑지 않은 내색을 보이면 "내가 대신 가서 본당생활 하고 싶다"고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가끔은 로만 칼라를 벗고 남방셔츠 차림으로 외출했다. 버스나 전철을 타면 "혹 추기경님 아니시냐"는 인사를 곧잘 받았다. "나도 그런 말을 자주 듣습니다"라며 같이 웃었다. 정월 대보름날엔 세뱃돈을 들고 성매매피해여성 쉼터를 찾았다. 옆집 가듯 점퍼에 구겨진 바지를 그대로 입은 그에게 쉼터 사람들이 "바지 좀 다려 입으시라"고 했다. 추기경이 뭔지도 모르는 몇몇은 아저씨라고도 불렀다. 밤늦도록 어울려 윷놀이를 했다. 세뱃돈으로 막걸리를 사오면 같이 마셨다. 낮고도 낮은 곳에 엎드린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편하고 좋았다.
◆안동본당 신부
초임지인 안동에서의 추억을 평생 잊지 못했다. 저녁이면 교리반을 열었다. 갈 곳 없는 신자들에게 성당은 사랑방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남성 신자들과 소주잔을 기울였다. 대구 출장을 가면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신자들도 정류장에 나와 흙먼지를 맞으며 신부를 기다렸다. 힘든 시절이라 구호품을 얻으려는 밀가루 신자들도 없지 않았지만 순박하고 정겨운 사람들과 한 가족이 됐다. 성탄절이면 안동 사람 모두가 듣도록 스피커 볼륨을 한껏 높여 캐럴송을 틀었다.
당시 안동 주민 거개의 삶은 궁핍했다. 전쟁 중이라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이도 부지기수였다. 미국주교회의 구호사업 한국지부장으로부터 적잖은 돈을 얻어 성당 보수작업을 벌였다. 신자들에게 일을 시키고 품삯을 넉넉히 주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신자들에겐 집안형편을 따져 따로 돈을 쥐어 주었다. 영혼뿐 아니라 가난까지 구제하고 싶었다. 삶이 신앙이고 신앙이 곧 삶인 가족공동체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도 신자들이 확 늘지는 않았다. 그보다 나을 것 없는 동창 신부는 인근 성당에서 기관장들까지 척척 입교시켰다. 전교는 하느님이 함께 해 주셔야 성과를 거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추기경 시절에도 신자 수 늘리기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후배 신부들에게 신자 수를 늘리기보다 세상에 복음을 얼마만큼 적시느냐에 온힘을 다하라고 당부했다.

◆목성동성당과 종교타운
목성동성당은 안동에서 제일 먼저 세워진 성당이다. 1927년 율세동에서 시작해 안막동을 거쳐 해방 후 지금 자리로 옮겼다. 안동교구가 새로 설정된 뒤 주교좌성당이 됐다. 성당 이름도 안동성당에서 목성동성당으로 변경했다.
목성동성당은 우리나라 민주화에 한 획을 그은 역사적 무대다. 유신 말기 '안동농민회 사건', 이른바 '오원춘 사건'으로 가톨릭과 정권이 충돌했다. 목성동성당에서 열린 시국기도회에 추기경도 참석했다. 추기경은 가난하고 핍박받는 민중들의 삶과 민주주의를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캐럴송, 자유와 정의의 외침이 안동 시내에 울려퍼져갔다. 안동 최초의 촛불시위와 농성에 시민들이 격려를 보냈다.
정부에 맞선 추기경의 행보를 두고 교회 안에서도 딴 목소리가 나왔다. 박정희 대통령의 비상대권 요구를 비판한 1971년 성탄 자정미사 강론 때도 그랬다. 추기경은 이렇게 회고했다. "누군가 그 말을 해야 하는데 아무도 할 사람이 없었다. 누군가가 있었다면 내가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성당이 자리한 목성동 일대는 종교타운이다. 백년이 넘은 개신교 교회와 불교 사찰, 안동김씨 종회소, 유교문화회관에 신흥종교 포교원까지 한 울타리에 자리를 잡았다. 성당과 교회 사이 화성공원에는 각 종교의 상징물과 문화재 모형도 마련돼 있다. 서로 다르면서도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정신을 이으려는 안동시의 작품이다. 정신문화의 도시이자 양반의 고장 안동이 보여주는 화이부동의 생생한 모습이다.
성당 입구에선 예수 성심상이 두 팔을 벌리고 사람들을 맞는다. 그 아래 돌비석에는 '기쁘고 떳떳하게'로 시작하는 안동교구 사명선언문이 새겨져 있다. '우리는 이 터에서 열린 마음으로 소박하게 살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서로 나누고 섬김으로써 기쁨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일군다'. 추기경이 원했던 가족공동체가 새삼 떠오른다.

◆김천 성의학교 교장
김천본당(현 김천황금성당) 신부 땐 성의학교 교장도 겸임했다. 학생들에게 격의 없이 대했다. 아버지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다가오는 그에게 학생들이 별명을 붙였다. 웃으면 코가 벌렁거린다고 '인자하신 콧님'이라고 불렀다. 제자 둘은 수녀원에 들어가 차례차례 수녀회 총원장을 지냈다.
4월 1일이었다. 아이를 안은 여성 신자가 병자성사를 가자고 했다. 허겁지겁 챙겨 택시를 타려는데 그녀가 말했다. "오늘 만우절이래요." 활짝 웃는 새댁을 바라보며 멋쩍게 웃는 추기경의 사진을 당시 갓난아기가 간직하고 있다.
마음 아픈 기억도 있다. 학교 경영을 책임진 터라 수업료 독촉도 해야 했다. 나이 지긋한 교육자들이 음담패설을 나누는 교장 모임에서는 실망도 했다. 그러나 젊은 신부이자 교장에게 보여준 김천 사람들의 따뜻하고 정겨운 맘씨를 잊지 못했다.
성의학교에서의 경험 덕에 평생 젊은이들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추기경 은퇴 때와 선종 후 명동성당 마당에 모인 사람들이 손팻말을 들고 이별을 아쉬워했다. '영원한 젊은 오빠, 사랑해요'.

김천성당은 가실성당에서 1901년 분리됐다. 한국인 여덟 번째 사제인 김성학(알렉스) 신부가 가실성당을 거쳐 이곳 초대 주임을 맡았다. 초가로 시작해 기와 성당을 거쳐 붉은 벽돌 고딕식 성당을 세웠다. 100주년이던 20년 전 옛 건물 옆에 새로 성당을 마련했다. 옛 성당과 새로 지은 성당이 마주보고 나란히 섰다. 성당 마당에는 김천지역 초기 순교자 현양비도 세웠다.

김 신부는 특히 교육사업에 열정을 바쳤다. 가실성당 시절 이루지 못한 학교 설립의 꿈을 김천에서 이뤘다. 성의학교를 세웠다. 오늘날 김천 성의중·고등학교와 성의여중·고등학교의 시작이다.
당시 교황청이 관심을 기울인 나라는 일본이었다. 상실감에 빠진 패전국 일본으로 선교사를 대거 파견했다. 한국의 선교사 파견 건의는 외면당했다. 추기경의 머리에 한국교회는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려면 가톨릭 정신이 깊은 나라에서 더 배워야 했다. 유학을 가겠다고 하자 교구장도 흔쾌히 허락했다.
처음에는 벨기에로 가려 했다. 서강대 설립을 준비하던 은사 게페르트 신부가 독일 뮌스터 대학의 요셉 회프너 신부를 소개했다. "신부인지 교수인지도 모르지만 그의 책을 읽어보니 사회학 이론이 매우 깊고 건전하다"는 충고였다. 새로운 세계가 그를 찾고 있었다. 한국 교회가 가야할 새로운 여정에의 준비와 단련의 시간이 추기경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영관 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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