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는 오랜 시간 마음 졸이며 보낸 시간이 많았다. 듣도 보도 못한 코로나 19라는 괴질의 무차별 공격으로 가족까지 갈라놓았다. 아들과 딸의 출입까지 봉쇄하는 아내의 강경한 태도는 어버이날이 되어서야 겨우 해제되었다. 아내는 지난 3개월 동안 자식들이 코로나에 감염될까 노심초사한 시간이었다. 현관에 들어서자 엄마부터 와락 껴안는다. 자식들에게는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먼저인 모양이다.
자식들은 "엄마 아빠, 부디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라"며 카네이션을 달아주고 봉투까지 내민다. 아내는 금세 눈시울을 붉힌다. '엄마'라는 이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말이라 한다. 내가 처음으로 기억한 말도, 마지막 가슴에 담은 말도 엄마인 것 같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엄마는 사십 대 후반의 나이에 장남인 나와 동생 등 여섯 식구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멍에를 짊어졌다. 남편을 잃은 아픔과 슬픔에 빠져 있을 수 없었다. 엄마는 더는 나약하거나 가녀린 여인이 아니었다. 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여맨 전사로 돌변하기까지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른 새벽부터 땅거미가 내리는 시간까지 논밭에서 고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곱던 피부는 까맣게 타들어 갔고 손등은 고목의 표피처럼 거칠어져 갔다. 그 힘든 농사일에 지쳐 있을 때도 나는 따뜻한 위로의 말도 건넬 줄 몰랐다. 엄마는 힘들게 일하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내가 면장으로 발령 나자 마을 잔치를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칠순 잔치에는 인근 노인복지시설을 찾아 당신 손수 잔치를 베풀어 주셨다. 팔순이 가까워지자 건강은 눈에 띄게 나빠졌다. 치매에 뇌졸중까지 겹쳐 힘든 나날을 보내면서도 자식에게 짐이 되기 싫어했다. 도시 생활이 지옥 같다며 고향 집으로 가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불편한 몸으로 갈 수 없다며 극구 만류했어도 소용이 없었다. 노후를 편안하게 해드리고자 합가를 했지만, 함께 한 시간은 고작 3년이 전부였다.
어머니는 죽음을 예감했는지 간절한 목소리로 "주님, 주님 곁에 갈 때가 되었으니 어서 데려가 달라"는 묵주기도만 반복했다. 신부님의 집전으로 종부성사를 마치자 잠든 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엄~~ 마~~" 가족들의 애절한 통곡을 뒤로하고 우리 곁을 떠나갔다. 내 자식이 그러하듯 나도 엄마가 보고 싶어 산소를 찾았다. 엄마의 흔적이라곤 화강석에 새겨진 이름뿐…, 우화 속에 청개구리가 된 듯 가슴이 먹먹해 온다. 생전에 제대로 모시지 못한 불효자의 회한이 눈물 되어 하염없이 흐른다. 서정길 달성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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