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원재의 삶 갈피] 인간과 사람

박원재 율곡연구원장
박원재 율곡연구원장

뜻이 비슷한데 꾸준히 함께 통용되는 말들이 있다. 뜻이 비슷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똑같지는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특히 우리말은 한자와의 오랜 인연으로 비슷한 뜻을 지닌 한자어와 고유어가 혼재되어 쓰이는 일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인간'과 '사람'이다. 이 두 어휘는 의미가 유사하지만 놓이는 언어적 환경에 따라 때로 무시할 수 없는 의미상의 차이를 드러낸다. 단적인 예가 "이 인간아!"라고 할 때와 "이 사람아!"라고 할 때의 뉘앙스 차이다. 앞의 말이 상대에 대해 얼마간의 비하와 경멸의 의미를 지닌다면, 뒤의 말에는 상대적으로 걱정과 애정이 묻어 있다.

'인간'과 '사람'의 이런 용례상의 차이는 이 어휘들의 역사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사람'은 우리 고유어이다. 어디 확인해 본 것은 아니지만, 추정컨대 '살다-살음-삶'으로 이어지는 어휘군에 속하는 단어가 아닐까 한다. 이 추정이 맞다면, '사람'은 '살다' 혹은 '살아가다'는 의미를 품은 동사적 뉘앙스가 스며 있는 말이라 할 것이다. 이에 비하여 '인간'은 영어의 'human being'에 대한 번역어라는 혐의가 짙다. 문화의 수입은 상대방의 생각을 자기의 말로 옮기는 일이다. 근대에 들어 서양과 만나면서 동아시아 세 나라(한국·중국·일본)에서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비슷한 일들이 진행되었다. 이 흐름을 선도한 것은 개항이 가장 빨랐던 일본이다. 당시 일본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동아시아 문화에는 생경한 서양의 개념어들을 한문 고전 속의 어휘들을 매개로 번역하였다. 지금 우리 일상에서 아무런 어색함 없이 쓰이고 있는 '사회' '개인' '과학' '자유' 등이 그와 같은 경로를 통해 만들어진 '근대'의 어휘들이다.

'인간'(人間)도 마찬가지다. 한문 고전에 이 말이 있기는 하지만 주로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그러던 것이 'human being'이라는 서양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여기에 '사람'의 의미가 덧보태져 새로운 개념어로 안착하게 된 것이다. '인간'이라는 말이 좀 더 개념적이고 딱딱한 명사적 뉘앙스를 띠는 이유이다. 이에 비해 '사람'은 무언가 살냄새 나는 분위기를 풍긴다. 이것이 "이 인간아!"와 "이 사람아!" 사이에 존재하는 의미의 갭일 터이다. '사람'에는 이처럼 다른 이들에게 기꺼이 곁을 내주고, 또 그들이 내준 곁에 마찬가지로 기꺼이 안기는 '더불어 삶'의 이미지가 녹아 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과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렇다면 "나이 칠십이 되자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도리를 넘지 않았다"고 한 공자의 말은 칠십에 비로소 '사람'이 되었다는 고백으로 들어도 좋을 것이다. 공자가 평생을 추구한 가치인 '인'(仁)은 곧 '사람다움'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나고, 사람으로 되어간다"고 하는 것이 실제에 더 부합할 듯하다. 요컨대, '사람'이 되는 것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제부터 연대기는 B.C.(코로나 이전: Before Corona)와 A.C.(코로나 이후: After Corona)를 사용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코로나 사태로 많은 것들이 바뀌고 있다. 모든 일에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공존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근래 공영방송 한 곳에서 코로나19를 헤쳐 나가고 있는 시민들의 의식을 조사한 내용을 보도하는 것을 들었다. 합심하여 난국을 슬기롭게 대처해 나가는 모습을 경험하면서 우리의 국가 역량과 시민 역량이 이른바 선진국이라는 나라들보다 낫다는 자부심을 느끼는 비율이 높아졌다는 내용이다. 이와 같은 설문 결과를 보도하면서 리포터는 "그만큼 함께 코로나19를 버텨내고 있는 이웃들의 힘을 믿는다는 말일 겁니다"라는 멘트로 마무리하고 있었다. 힘든 상황을 겪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 사회가 다른 이들에게 곁을 내주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있다는 신호로 들린다. 코로나가 우리에게 준 선물이라고 하면 지나친 긍정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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