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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세상 읽기] 질경이처럼

전경옥 언론인
앤서니 파우치 미국 국립보건원 산하 국립알레르기·전염병 연구소(NIAID) 소장이 12일(현지시간) 상원 보건·교육·노동·연금위원회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 청문회에 화상으로 참석해 증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경옥 언론인

중국 역사 속엔 흥미로운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면 만나보고 싶은 사람들이 여럿 있다. 진(秦) 시황을 비롯하여 천하를 두고 맞붙었던 항우와 유방, 삼국시대의 조조, 유비, 제갈량도 만나고 싶고, 쭉 내려가 당나라의 이백과 두보에게서 시 한 수 듣고, 경국지색 양귀비도 만나보고 싶다. 그리고 북송의 풍류황제 휘종과 청나라 전성기의 강희제, 청말의 절대권력자 서태후…. 열손가락으로는 모자라겠다.

시절이 하수상해서일까, 사마천(司馬遷)이 자주 생각난다. 앤서니 파우치 미(美) 국립 알레르기·전염병 연구소장이 대통령 6명과 일한 비결로 대통령 비위를 안 맞춘다고 밝힌 기사를 보면서 더욱 그러하다. 쓴소리를 싫어하는 트럼프에게 언제 트위터 해고를 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대통령과 마찰을 빚으면서도 설득해 내는 '미스터 쓴소리'의 소신 행보가 남달라서다.

산길에 핀 질경이. 매일신문 DB
앤서니 파우치 미국 국립보건원 산하 국립알레르기·전염병 연구소(NIAID) 소장이 12일(현지시간) 상원 보건·교육·노동·연금위원회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 청문회에 화상으로 참석해 증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한(前漢) 시대 사마천(B.C.145?~B.C.86?)은 황제의 노여움을 산 죄로 큰 곤욕을 치른 사람이다. 사관 가문에서 자란 사마천은 태사령(太史令)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스무살무렵 부터 천하를 주유하며 역사적 소양을 키웠다. 조정의 말단 관리로 일하다 아버지 사후 태사령이 됐다. 선친의 유지를 따라 역사서 편찬 작업을 하던 중 난데없이 '이릉(李陵)의 화(禍)'에 휘말렸다. 이릉은 흉노 정벌에 큰 공을 세운 명장 이광의 손자로 그 역시 뛰어난 무장. 무제(武帝)의 명에 따라 5천 병사로 흉노와의 전투에서 전과를 올리던 이릉부대는 8만 군사로 재공격해온 흉노군에 포위됐다. 10여일간 사투끝에 화살은 떨어지고, 지원군도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결국 이릉은 투항했다. 격노한 무제 앞에서 눈치빠른 중신들은 앞다퉈 이릉을 비난했다. 오로지 사마천만 겁도 없이(?) 이릉을 변호했다. 5천 병사로 8만 흉노군에 맞서 많은 전과를 올렸고, 중과부적으로 포로가 됐지만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서일 것이라고 옹호했다. 이릉과 교유가 없었지만 그의 됨됨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일로 격노한 무제는 사마천을 감옥에 가뒀고, 군주 기만죄로 사형이 언도됐다. 죽음 앞에서 사마천은 선친의 유언을 떠올렸다. 사형을 피할 방법은 거액의 속죄금을 내거나 치욕적인 궁형을 받는 것 두 가지 밖에 없었다. 가난한 사마천은 결국 궁형을 택했다. 감옥에서도 저술을 계속했고, 대사면령으로 출옥한 후 환관직인 중서령으로 일하면서도 붓을 놓지 않았다. 끊임없는 심신의 고통에 식은 땀을 흘리면서도 발분(發憤)한 결과 마침내 16년만에 상고시대부터 무제때까지 3천여 년 역사를 독창적인 기전체로 담아낸 대역사서 『사기(史記)』를 완성했다. 박경리 선생의 시 '사마천'을 통해 그의 아픔과 고독, 열정을 상상해 본다. '그대는 사랑의 기억도 없을 것이다/ 긴 낮 긴 밤을/ 멀미같이 시간을 앓았을 것이다/ 천형(天刑) 때문에 홀로 앉아/ 글을 썼던 사람/ 육체를 거세당하고/ 인생을 거세당하고/ 엉덩이 하나 놓을 자리 의지하며/ 그대는 진실을 기록하려 했는가'

사마천의 결기를 읽을 수 있는 일화가 또 있다. 한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든 무제는 사마천이 『사기』에서 자신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자신을 폭군으로 비판한 내용이 있었다. 불사르지 않겠노라 했지만 화를 억누르지 못해 불태우라 고함쳤다가 다시 명을 거두는 소동을 벌였다. "너 때문에 내 수명이 줄어든 것 같다" 고 하면서도 사마천을 죽이지는 않았다. 보통 그릇은 아닌 것 같다.

정의기억연대 출신 더불어시민당 윤미향 당선인에 대한 수요집회 기부금과 한일 위안부 합의 관련 논란이 불거진 가운데 10일 종로구 주한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에 빗물이 맺혀 있다. 연합뉴스
산길에 핀 질경이. 매일신문 DB

얼마전, 소담한 계곡을 끼고 짧은 산행을 했다. 절집까지는 한줄기 외길, 녹음 우거지고 산새 지저귀는 한갓진 길이었다. 올라갈 때는 못 봤는데 내려올 때 보니 길가 곳곳에 질경이가 무리지어 있었다. 대부분 길옆이다. 하필이면 사람들 발에 짓밟히고 차바퀴에도 깔리는 험지에서 살까. 예로부터 우마차가 오가는 길에서 산다하여 '차전초(車前草)'라는 한자 이름이 있는걸 보면 거친 환경에서 사는 게 질경이의 숙명인 모양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나태주 '풀꽃')라는 시를 떠올려보지만 질경이는 아무리 봐도 예쁘진 않다. 오히려 길가의 천덕꾸러기 같다. 하지만 밟혀도 짓눌려도 살아나는 생명력이 은근히 감동을 준다. '소신' 때문에 평생을 죽음 못지 않은 고통을 겪으면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역사를 만든 사마천의 모습을 질경이에게서 찾아본다. 역저 『사기(史記)』는 중국 정통 역사서인 24사(또는 25사)의 첫머리에 위치해 있다. '사마천' 이름 석자 앞엔 '사성(史聖)', '중국 역사의 아버지'라는 영예로운 접두어가 붙는다.

정의기억연대 출신 더불어시민당 윤미향 당선인에 대한 수요집회 기부금과 한일 위안부 합의 관련 논란이 불거진 가운데 10일 종로구 주한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에 빗물이 맺혀 있다. 연합뉴스

'윤미향 사태'와 또다시 등장한 집권당의 과거사 뒤집기 행보로 민심이 어수선하다. 나라의 중심축을 잡아줘야 할 위치의 사람들은 눈치만 보거나 오불관언(吾不關焉)이다. 자리보전과 영달만 꾀하는 것 같아 비겁해 보인다. 권력자 앞에서도 당당히 쓴소리 하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왜 이리 힘들까. 좁은 길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소신파 리더들이 이다지도 없을까.

전경옥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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