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흰쌀밥을 건네주던 황중사님 그립습니다.
1950년 8월, 한반도에 6·25전쟁이 발생한지 2달만인 16살 중학교 시절 소년병으로 입대했다. 입대 후 간단한 총기 사용법만 배운 뒤 전쟁에 참여했는데, 당시 등대처럼 의지했던 분이 있다. 그분은 황해도 연백 출신으로 이름은 정확히 알지못하지만 어린 나에게는 황중사라는 이름아닌 호칭으로만 나의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있다. 70년 세월에 그의 본명은 잊혀졌지만 그의 따스했던 말과 카리스마 넘쳤던 눈빛 등은 아직도 생생하다. 호랑이 같던 아버지보다 더 무서운 그였지만 항상 의지하고 따랐다.
황중사님과 함께 전장을 누빈 2년(50년~52년)이 내 인생에 가장 중요했던 시기였다. 그에게 벙커에서 숨는법, 총을 쏘는 법, 이동하는 방법 등 각종 전략을 전수받아 총 4년여 간의 복무를 마치고 54년 1월 무사히 전역을 했기 때문이다. 군생활 처음 만난 그에게 잘 배워 지금도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체력을 다지고 허기를 달래기 위해 섭취하던 전투식량도 양보해주던, 단순히 고맙다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런 분이셨다. 사실 전쟁 상황에서 음식을 섭취하는 것은 병력들의 전투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또 당시 한국 사회는 워낙 먹고 살기 힘든데다, 전쟁까지 겹치면서 서로에게 음식을 나눠주는 일은 상당히 큰 결심을 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황중사님은 총탄이 빗발치고 포탄이 날아드는 전쟁통에서 흰쌀밥이 들어간 특식이 나올때면 "먼저 밥을 먹었으니 신경쓰지말고 이거부터 먹어라"며 어린 소년병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던 따뜻한 사람이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생사를 넘나드는 기로에서도 황중사님은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소년병들을 위로하며 부모님에 그리움과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주었습니다.

이후에도 황중사님의 도움이 컸다. 1사단 포병 사령부가 창설될 당시 작전선임하사로 갈 수 있도록 황중사님이 큰 도움을 줬다. 그런 그가 있었기에 집으로 살아 돌아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름도 모르고 연도 닿지 않지만 그와 함께 했던 시절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살아 계신지 하늘나라에 계신지 알 수 없지만 언젠가 황중사님을 만나, 두 손을 꼭 붙잡고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올해로 6·25전쟁이 발생한지 70년이 되었습니다. 그때의 어린 소년병도 이제 백발이 되었지만 그 시절을 잊지 못합니다.황중사님 정말 감사하고 그립습니다.
윤한수 6·25 참전 소년병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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