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그립습니다] 노정희 씨 父 고 노민섭 씨

실향 아픔 딛고 농사에 쏟은 땀방울만 기억…

1985년 1월 16일 아버지 고 노민섭씨 회갑. 동네 장정들이 사다리 가마 태워주는 모습
1985년 1월 16일 아버지 고 노민섭씨 회갑. 동네 장정들이 사다리 가마 태워주는 모습

아버지 고 노민섭은 실향민이었다. 여남은 살에 떠나온 항구 마을에 대한 추억을 평생 가슴에 안고 사셨다. 할머니는 함흥 지방 유지의 딸이었다. 할아버지와 혼인하여 슬하에 사 남매를 두었는데, 맏이가 배를 움켜쥐고 쓰러졌다. 끝내 자식은 깨어나지 못했고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해 고향을 떠나왔다. 할머니 친정에서는 젖먹이를 떼어놓고 가라고, 그래야 고향으로 빨리 돌아올 것 아니냐며 눈물 바람을 보였다. 아버지는 남동생 손을 잡고 부모님을 따라나섰다. 막내 여동생은 젖먹이였다. 마음 진정되면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끝내 북녘땅을 밟지 못했다.

아버지는 조부모님이 돌아가신 후부터 부쩍 술을 마셨다. 고향과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을 떨쳐버리지 못해 술을 친구 삼았는지도 모른다. 출렁이는 고향 바다를 술잔에 담아 '나그네 설움'을 노래했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17년 전, 농사철이 가까운 봄날 새벽에 아버지는 영영 눈을 감으셨다. 심장마비였다. 염장이 아저씨께 부탁드려 아버지 습(襲)을 도왔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온몸을 만져보았다. 며칠만이라도 자리보존 하였다면 이별 준비라도 하였을 텐데, 뜨거운 눈물로 아버지 몸을 녹여드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1994년 2월 20일 아버지 칠순에
1994년 2월 20일 아버지 칠순에 '부곡 하와이' 가족 나들이(사진 중앙에 모자 쓴 분이 아버지)

아버지는 꽃상여를 타고 떠났다. 선소리꾼이 흔드는 방울 소리, 상두꾼들의 구성진 곡조에 맞춰 만장(輓章)은 유난히 화려하게 펄럭거렸다. 동네 장정들은 아버지가 누운 황토방에 올라가 온 힘을 다해 밟았다. 황토 이불 한 자락 펄럭이면 실향의 아픔이 밟히고, 또 한 자락 펄럭이면 몸서리치던 외로움이 밟혔다. 아픈 하늘은 산허리를 친친 감고 내려와 아버지의 새집 앞에 엎드려 통곡했다.

이제 아버지는 계시지 않는다. 나뭇지게에 진달래 꽂아 오고, 칡 이파리에 산딸기 담아 오던 아버지. 산에서 난 열매 따다 함지박에 부어주고, 설익은 다래와 으름은 등겨 단지에 묻어 들며 나며 말캉한 다래를 골라주던 아버지. 쇠죽 솥 아궁이에서 꺼내주는 군밤과 군고구마 맛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꼬마가 해 주는 반찬이 맛있다." 음식 만들기에 취미를 붙인 것은 순전히 아버지의 칭찬 덕분이었다.

아버지는 굳이 삶의 지침을 말씀하지 않으셨다. 평생 흙냄새, 흙 빛깔의 전설을 퍼 올리다 떠나셨다. 자식들은 농사에 정성을 쏟으시는 아버지의 땀방울을 보았을 뿐이다. 삼베적삼에 절인 시큼한 땀 냄새를 기억할 뿐이다. 내 기억 중심에 얼룩무늬처럼 배여 있는 아버지의 땀 냄새가 몹시 그리운 날이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딸 노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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