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순은 해방 이후 최초의 시 전문 동인지로 1946년 5월 창간, 1949년 7월까지 11집과 임시증간호를 포함해 12권을 발간하였다. 지역에서 발행된 시 전문 동인지라는 점에서 문학아카이브 업무 시 우선적으로 수집해야 하는 자료였다. 하지만 '죽순'에 대한 자료수집과 아카이브 구축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직접 발로 뛰면서 지역의 원로문인들을 차례로 방문하여 문학아카이브 구축의 취지를 안내하고 기증을 유도하였지만 정작 12권 전체의 온전한 동인지를 간직하고 있는 원로 인사들은 극히 드물었다. 이윤수의 유가족과 접촉하여 '죽순'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지만, 아쉽게도 자료를 만나볼 수는 없었다. 남겨진 자료가 희소한 것은 발간할 당시 자금난으로 발행 부수가 적기도 했거니와 보존 자체가 어려운 재질인 갱지(更紙)류로 발행되어 시간이 지나면서 대부분 파손, 소실되었기 때문이었다. 간신히 창간호만 수집해 있다 대구문학관 개관 후 지역 고서적 업체의 경매를 통해서 임시증간호를 포함한 전체 12권을 오롯이 아카이빙할 수 있었다.
'죽순'뿐만 아니라 근대에 발행된 자료의 구축에 힘이 겨운 까닭은 일제 치하의 조선과 해방, 미군정 집권 시기, 한국전쟁의 발발이라는 시대상을 살펴보면 쉬이 이해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1930년대 문화통치가 이루어지면서 많은 종류의 책들이 일본어판으로 제작되어 발간되었다. 이후 급작스런 일본의 패망과 해방을 맞이하면서 한국어판 서적의 제작으로 출판계는 잠시나마 활황을 이루지만 인쇄 기술의 한계와 한국전쟁의 발발로 인한 경제난과 용지난을 겪으면서 해방을 맞이한 1945년에서부터 한국전쟁을 겪은 1950년대에 발행되었던 책들은 대부분 보존되지 못하고 분실되거나 소실되었다. 수집 과정에서 확인을 해보면 보존되어 있다 하더라도 갱지류로 발간된 대부분의 당시 책들은 일제강점기에 발행되었던 책들보다 현격히 질이 떨어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죽순(竹筍)'은 이윤수의 주재 하에 죽순시인구락부의 동인 모임 활동 일환으로 발간되었다. 죽순의 창간 동인으로는 김동사, 박목월, 유치환, 이영도, 이호우, 최해룡, 이응창 등이 있었으며, 회차가 진행될수록 구상, 김춘수, 신동집, 이설주, 박양균 등 지역의 문인들이 참여하였다. 김요섭과 천상병은 죽순을 통해 원고를 발표하기도 했다. 목우는 직접 발품을 팔아 원고를 취합하는 수고스러움을 마다하지 않으며 실질적인 죽순의 편집과 발간을 담당하였다. 그 노력으로 온전한 동인지로 발간은 되었지만, 회차 마다의 편집후기에는 질곡의 시대에 대한 생생한 속살이 고스란히 담고 있다. 창간호의 편집후기에서 "죽순처럼 힘차게 항상 푸른 대처럼 절개롭게 굳은 마음으로 똑바르게, 이 고장 시문학의 봉화가 되겠다!"고 눈 덮힌 대지를 뚫고 솟아오르는 죽순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지만, 7집 이후부터의 편집후기에는 생계와 발간에 대한 자금난, 용지난에 대한 걱정이 유달리 드러난다. 결국 마지막이 된 12집 종간호에는 자조섞인 회한의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하지만 '죽순'의 염원은 꺾이지 않아 30년이 지난 1979년 지역의 문인들과 전국 필진의 참여로 복간되기에 이르렀고, 현재까지 그 의지를 담아 왕대의 숲을 이루며 한 세기 가까이 우리시대의 문학을 현재진행형으로 아카이빙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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