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인숙의 옛 그림 예찬]정종여(1914-1984), ‘촉석루’

미술사 연구자

종이에 수묵, 30×41.5㎝, 개인 소장
종이에 수묵, 30×41.5㎝, 개인 소장

진주 남강 가에 있는 촉석루 풍경이다. 즉석에서 완성한 스케치풍이어서 필묵의 즉흥감이 주는 사생 수묵화의 눈 맛이 뛰어나다. 강 건너에서 바라본 웅장한 촉석루와 주변의 수목을 화면의 중심으로 삼고 저 멀리 허공중의 산(지리산?)과 아래쪽 강, 촉석루가 자리한 암벽 등으로 회화적 구성의 균형과 경치의 현장감을 동시에 완성했다. 눈앞의 복잡다단한 풍경을 순식간에 한 붓으로 한 장면화 한 실력은 정종여가 현장 사생 훈련을 오래 쌓았음을 보여준다.

거창에서 태어난 정종여는 그의 그림 재주를 아낀 해인사 스님의 후원으로 1934-1942년 오사카미술학교에 유학하며 일본화, 서양화를 익히는 중에도 방학 등 틈틈이 국내로 와 청전 이상범에게 산수화를 배우며 당시의 미술을 모두 흡수하려 한 의욕이 넘치는 예술가였다.

정종여는 산수, 인물, 화조 등을 다 잘 그렸지만 국립현대미술관의 '근대미술가의 재발견' 시리즈로 2019년 덕수궁관에서 열린 '절필시대' 전시회에 나왔던 '가야산'10폭 병풍(1941년, 28세), '금강산 전망'10폭 연병(1942년, 29세), '지리산 조운도(朝雲圖)'(1948년, 35세) 등을 보면 일본과 조선, 서양화와 동양화를 넘나들었지만 우리나라의 국토와 현실에 뿌리를 둔 실경 산수화가 그의 목표였음을 알 수 있다. 정종여가 전국을 기행하며 화폭에 담아낸 이 대작들에는 우리 산하의 자연 풍광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1940년대를 통해 왕성한 창작력을 보여주었던 정종여는 1950년 9월 월북해 남한의 미술사에서 잊혀졌다.

1988년에야 6'25를 전후로 납북 혹은 월북한 미술인 41명의 작품이 해금되었다. 해금된 이듬해 서울에서 정종여 회고전이 열렸을 때 도록에 실린 소설가 이병주(1921-1992)의 '지용과 청계의 남해기행'이라는 글에 정종여가 1950년 6월 진주에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병주는 고향이 하동이지만 거창과 하동은 모두 진주가 중심도시여서 이들에게는 같은 '진주 문화권' 출신 일본유학파라는 유대감이 있었는데 진주농대 교수로 있던 이병주를 정종여가 시인 정지용(1902-1950)과 함께 찾아간 것이다. 정종여의 그림과 정지용의 글로 구성한 코너를 국도신문에 연재하며 남해를 기행 하는 중이었다. 통영에서는 정종여가 그림을 그리고 정지용이 시를 써 넣어 합작한 시화(詩畵)를 청마 유치환에게 선물하기도 하고 부산에서는 시화전도 열었다.

정종여가 진주 촉석루를 그린 삽화는 '남해오월점철(南海五月點綴)' 제14화로 국도신문 1950년 6월 20일자에 실렸다. 며칠 후 육이오가 일어났다. 정지용은 납북 중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고, 북한에서 정종여는 평양미술대학 교수를 지내며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조선화분과위원장(1964년)이 되고 공훈예술가(1974년), 인민예술가(1982년) 칭호를 받으며 활발하게 활동하다 1984년 71세로 작고했다. 유월이라 정종여의 남한에서의 절필작 중 하나인 '촉석루'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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