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또 6월을 맞고 보내며

국방부 청사. 연합뉴스
국방부 청사. 연합뉴스
정인열 논설위원
정인열 논설위원

한국 고전소설 '춘향전'에는 기생 춘향을 괴롭히며 술판을 벌이는 수령 변 사또를 준엄히 꾸짖는 암행어사 이 도령의 '어사시'가 나온다. 널리 알려진 '금잔의 좋은 술은 온 백성의 피요'로 시작해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높구나'로 끝을 맺는 네 구절에 각 일곱 글자로 된 7언(言) 한시이다.

조선 옛 소설 속에 나온 뒤 상대의 아픈 곳을 비판하고 나무랄 때 자주 인용된다. 문재인 정권을 겨냥해 지난 2018년 자유한국당 김성원 원내대변인도 '적폐 인사 임명하고 버티는 것은 문 정권의 오만이요'로 바꿔 '서해는 천대하면서 북한에 아첨하니 근심 소리 높구나'로 끝낸 개사도 그 사례다.

이 흘러간 시가 한국전쟁이 한창인 1951년 7월 5일 대구의 한 초교 강당의 군사 법정에서도 울려 퍼졌다. 북한의 남침에 맞서 아수라장이 된 싸움터에서 하루하루 버티는 것만으로도 힘겹게 여길 때, 낯선 군사재판의 임시 법정에서 웬 술타령을 엄히 꾸짖는 검찰관(김태청)의 논고문까지 등장했을까.

'금잔에 담긴 좋은 술은 방위군 장정들의 피요(金樽美酒民兵血)/ 옥으로 만든 상 위에 차려진 음식과 안주는 장정들에게서 짜낸 기름이라(玉盤佳肴壯丁膏)/ 물 쓰듯 항목 바꾼 예산 탕진에 장정들의 눈물이 흐르는구나(項目流時兵淚流)/ 웃음소리 높은 뒤꼍에는 울음소리 높은 줄 알아라(笑聲高處哭聲高).'

논고를 들은 죄인은 우리 국방사에 길이(?) 남을 부정부패 사례인 이른바 '국민방위군사건' 관련자 16명. 이들은 후방 군병력 확보를 위해 1950년 12월부터 모은 수십만 젊은이에게 줄 돈과 쌀, 옷 등을 빼돌려 5만 명을 굶겨 병들고 얼어 죽게 만들고 술판 등에 50억원 넘는 돈을 흥청망청 쓴 혐의다.

어찌 그들만의 잘못이랴. 그들이 전쟁의 한가운데 겁 없이, 매일 죽어가는 젊은 예비 군인들의 뻔한 사정을 알면서도 빼돌려 헛되이 쓴 일이 저들만의 소행일까. 오죽했으면 어느 누가 '옛일을 말해버릴까'라고 했다가 '덮고 가자'며 달래는 상사의 호소(?)에 억울한 마음을 가누지 못했다고 하지 않는가.

공범이 누구였든, 또 다른 윗선이 누구였든, 이들 가운데 5명은 사형선고를 받은 뒤 그해 8월 13일 대구 달성군 화원면 앞산 자락, 오늘날 달서구 송현동의 한 골짜기에서 총살로 한 삶을 마쳐야만 했다. 매일신문은 당시 8월 14일 자에서 '세인(世人)의 이목(耳目)을 끌던 국민방위군 의옥사건'의 끝을 전하며 '영화(榮華)의 주인공들 이슬로 사라지다'라는 제목을 달았다.

한국전쟁 기간(1950. 6. 25~1953. 7. 27) 가운데 34일(1950. 7. 16~8. 18), 잠깐 한국 수도였던 대구는 이런 슬픈 한국전쟁사 일부를 품고, 낙동강 방어선의 최후 보루였기에 군대와 전쟁에 남다를 수 있다. 잇따른 군의 부정부패나, 최근 불거진 지휘자의 갑질과 같은 꼴불견의 여러 일탈은 더욱 그렇다.

최근 청와대에 한 기업인 아들이 군 복무 중 멋대로 휴가를 가고 홀로 생활관을 쓰거나, 부사관을 심부름꾼처럼 부린 일 등 '황제 군 복무'의 일탈을 고발한 글이 올랐다. 공군은 15일 수사를 시작했다고 밝혔고, 원인철 공군 참모총장은 "대국민 신뢰가 이렇게 무너진 적은 거의 없었을 정도"라고 고백했다.

군기 문란의 극치로 국민 심기가 불편하고 어수선한데, 북한은 군사행동도 불사하겠다는 위협으로 연일 험한 말을 내뱉지만 문 정부는 말이 없다. 여기에 범여권 국회의원 173명은 북핵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종전선언' 몰이에 나설 모양이다. 뭔가 불안이 나라를 휘감는다. 한국전쟁 70년을 맞아, 자녀를 군에 보낸 힘없는 부모들 속앓이가 산하를 울리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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