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태훈의 대구 옛 이야기] 망우당 곽재우

대구 영남중 교사
대구 영남중 교사

망우당 곽재우(郭再祐·1552~1617)는 정인홍·김면과 함께 임진왜란 당시 영남지방 의병삼장(義兵三將)으로 손꼽히던 의병장이었다.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현 세간리에서 부친 곽월(郭越)과 어머니 진주 강씨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4세 때 독학으로 '춘추'를 공부하였으며 15세 때 제자백가의 서적들을, 16세에 잡학과 병서까지 섭렵하면서 학문의 폭을 넓혔다. 부친의 3년상을 치른 이후에는 돈지강사를 지어 학문에 몰두하였다.

1592년 5월 23일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곽재우는 6월 1일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으로 부르면서 의병들을 모집하여 정암진 전투에서 왜군 2만여 명을 몰살하였다. 정암진 전투는 의령을 거쳐 호남으로 진격하려던 왜군들의 침략 야욕을 분쇄하였으며 왜군의 내륙 보급로를 차단하였던, 육지에서 조선군이 승리했던 최초의 전투였다. 곧이어 곽재우의 의병부대는 현풍·창녕 영산에 주둔했던 왜군을 축출하여 수복하였고 진주목사 김시민의 제1차 진주성 전투에 그의 심복인 심대승을 선봉장에 임명하고 200여 명의 군사를 지원하여 승리를 거두는데 공헌하였다.

곽재우는 이러한 전공에 힘입어 1592년 6월 이후 유곡찰방(幽谷察訪)·형조정랑(刑曹正郎)·절충장군(折衝將軍)·조방장(助防將)을 거쳐 1593년 4월 성주목사가 되어 함안·의령 등지에 주둔한 왜군들의 군사 활동을 정탐하여 조정에 첩보하고 도체찰사 류성룡의 명을 받아 정진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던 중 1593년 6월 의병장 김천일 등이 이끄는 조선군이 왜군과 제2차 진주성 전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곽재우는 진주성 안에 들어가서 싸우라는 명령에 대해, 보복전에 혈안이 되었던 왜군의 전력이 우세하였기 때문에 승산이 없는 작전임을 지적하면서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1593년 후반 곽재우가 산성을 거점으로 방어전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자 조정은 이를 수용하여 그에게 삼가·의령·단성·고령 등 주요 산성들을 수축·관리하는 일을 총괄하도록 지시하였다. 곽재우는 경상우도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삼가의 악견산성, 가야산의 용기산성, 지리산의 구성산성 등을 정비하였다.

한편 1594년 9월 곽재우는 권율·이순신·원균·김덕령 등과 함께 거제에 주둔한 왜군을 격퇴하기 위한 수륙 연합 작전에 참전하였는데 이순신이 배에 탔던 육군의 상륙을 명령하자, 곽재우는 뭍에 내려 싸운다면 조선군이 반드시 전멸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순신의 공격 명령을 끝내 거부한 채 권율에게 보고하고 떠나버렸다.

1595년 12월 말 곽재우는 진주목사에 임명되었지만 머지않아 낙향하였다. 하지만 이덕형·김우옹·윤근수·이원익 등이 차례로 곽재우를 등용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선조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었다가 결국 1596년 11월 경상우도 방어사에 임명되었다. 곽재우가 임진왜란 초에 경상감사 김수가 왜군에 패배하여 도피한 것을 비난하며 그를 처단할 것을 요구한 것을 두고 선조는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킨 것에 의심을 품었다.

또한 제2차 진주성 전투와 거제도 전투 과정에서 드러났던 지휘부와의 갈등과 이몽학의 난에 의해 처형당한 김덕령의 허무한 죽음을 통해 한동안 곽재우는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단념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곽재우는 1597년 경상좌도 방어사로서 현풍의 석문산성을 수축하던 중 정유재란이 발생하자 창녕의 화왕산성에서 왜군을 격파하였다.

왜란이 종식되자 곽재우는 경상좌도 병사 관직을 임의로 떠난 것과 왜적과의 화친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전라도 영암으로 유배되었다. 1602년 귀양살이를 끝낸 곽재우는 현풍 비슬산에 들어가 창암강사를 짓고 '망우정'(忘憂亭)이라는 현판을 달고 곡기를 끊고 솔잎을 먹으며 지냈다. 광해군 재위 기간에 그는 임해군의 처단, 대규모 토목 공사 중단, 대동법 시행, 영창대군 처형 반대 등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현재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에 곽재우의 묘가 있다. 그의 전기를 회상하며 그의 강직한 성품과 왜란 중에 쌓았던 무공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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