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매 순간 선택이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든, 많은 것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든 모든 선택은 여운을 남긴다. 그것은 솔로베이치크(Soloveitchik)의 이야기처럼 우리 본성이 두 가지를 놓고 갈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외적인 성공과 내적인 가치를 함께 추구한다. 이뿐인가.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꿈에 부풀어 내일을 살기도 하고, 실의에 젖은 마음을 과거에 묻고 살기도 한다. 우리가 사는 동안 완성할 가치는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가. 그것은 청년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미래에 있는가, 아니면 노년의 세련미로 살아가면서 적당히 과거를 회상하는 데 있는가.
"유년에는 유년의 아름다움이 있고, 장년에는 장년의 아름다움이 있어 취사하고 선택할 여지는 없지마는, 신록에 있어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 역시 이즈음과 같은 그의 청춘 시대." 이양하는 '신록예찬'에서 청년의 삶이 아름다움이라고 했다. 마음의 약동을 소망하지 않는 인생이 있겠는가. 그러나 밝은 면이 있으면 어두운 면이 있기 마련. 청년은 항상 도래할 미래를 꿈꾼다. 청년은 미래가 자신에게 무엇을 선사할 것인지를 상상하며 살아간다. 심지어 우리는 미래가 너무 천천히 오는 것 같아 빨리 오라고 손짓하기도 한다. 파스칼은 이러한 인간 존재를 "실제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살기를 희망할 뿐인 존재"라고 했다. 나아가 그는 "언제나 행복해지는 방법을 계획만 하고 있지 절대로 행복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하지 않았는가.
나이 듦의 아름다움은 지혜에 있다. 그들에게서 우리는 친근감과 평온함을 느낀다.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세상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모습이 경이롭다. 울만(Ullman)의 시처럼 "때로는 스무 살 청년보다 예순 살 노인이 더 청춘일 수 있다" "나이를 더해가는 것만으로 사람은 늙지 않는다"고 노년을 위로하지 않아도, 노년은 그 자체로 종결미가 아닌가. 그러나 노년은 먼 과거의 일들이 너무 또렷이 기억나고, 그 기억을 기준으로 세상을 보는 아픔이 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시간이고,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흔적일 뿐이다. 과거의 기억 속에 살아가는 존재를 진정한 삶을 사는 존재라 할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 과거의 나는 생생하게 그려지고, 미래의 나도 그럴듯하게 그려진다. 하지만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로 그린 자화상이 진정한 자화상이 될 수는 없다. 더더욱 우리는 과거에 살 수도 없고 미래에 살 수도 없다. 우리가 과거라고 하는 것은 우리 마음에 저장된 과거의 흔적이다. 미래는 단지 마음의 투사물, 상상 속의 지금이지 않는가. 우리는 지금도 우리가 속하지 않은 시간 속을 헤매느라 진정 우리 자신의 시간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고 있다.
우리는 미래의 시간을 말하고 과거의 시간을 말하지만, 사실 존재하는 것은 현재의 시간밖에 없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과거의 일은 현재의 기억이요, 현재 일의 현재는 직관이며, 미래 일의 현재는 기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순간을 살아가야 하는가.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기대하는 삶도 현재의 일이니 현재, 이 순간을 직관하는 삶이야말로 자기로 사는 길이 아니겠는가. 현재를 직관하는 삶, 즉 지금 이 순간을 알아차리고 사는 삶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현재의 직관은 현재라는 시간 그 자체를 직관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진정한 직관은 시간을 만드신 하나님을 직관하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순간을 산다는 것은 뚜벅뚜벅 시간 밖으로 걸어 나와 우리의 시간을 설계한 그분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다. 이것이 시간의 존재 영원을 경험하며 사는 길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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