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종이 쪼가리

정경훈 논설위원
정경훈 논설위원

조약이든 합의든 국가 간의 약속은 지킬 뜻이 없거나 강제하려는 의지가 뒤따르지 않으면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다. 1차 대전 종전 체제를 마련한 1919년 베르사유 조약과 영국 역사가 폴 존슨이 '깡패들의 협약'이라고 한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은 이를 잘 보여준다.

베르사유 조약의 목표는 독일이 또다시 침략할 경우를 대비한 안보 제공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치명적인 한계를 품고 있었다. 독일 군비의 철폐든, 전쟁 배상금 지불이든 독일의 실행 의지가 있어야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독일이 거부하면 연합국은 전쟁 재개 위협, 독일 영토 점령이나 봉쇄 등 실력 행사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조약을 준수하겠다는 독일 정부의 서명뿐이었다. 독일은 지킬 수도 있고 이전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더욱이 연합국은 파멸적인 전쟁을 방금 끝낸 마당에 다시 전쟁을 할 생각이 없었다. 독일은 지키는 시늉만 했다.

불가침 조약을 맺은 스탈린과 히틀러의 꿍꿍이는 서로 달랐다. 독일과의 국경에 배치된 병력을 극동으로 이동 배치해 일본의 공격에 대비하는 한편 자본주의 진영의 피 튀기는 싸움을 느긋하게 구경하면서 피폐해진 자본주의 진영을 손쉽게 삼킨다는 게 스탈린의 구상이었다. 그 싸움의 최종 승자가 독일이든 영국이든 상관하지 않을 터였다. 반면 히틀러의 속셈은 서유럽을 정복할 때까지 독일 동쪽을 안전지대로 만들고, 그 뒤 소련을 쳐서 독일 식민지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히틀러와 스탈린 모두 애초부터 '조약'을 지킬 의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1941년 독일의 소련 침략은 조금 빨랐을 뿐 예정된 것이었다. 히틀러가 스탈린의 생각대로 서유럽을 정복한 만신창이가 됐다면 스탈린이 '선방'을 날렸을 것이다.

북한이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함으로써 '판문점 선언'도 박살 났다. 고래(古來)로 지킬 의지가 없는 조약이나 합의는 언제든 종이 쪼가리가 된다는 진실을 외면해서 초래한 처참한 결과다. 문재인 정권은 이 '선언'으로 한반도에 평화가 왔다고 거짓 선전을 했다. 국민에게 사죄하고 정치적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인내하겠다"고 한다. 정말로 '구제 불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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