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은 활동 당시 창작자의 사유와 사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예술가의 작품은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시대의 사람들을 통해 비평되고 해제되면서 회자된다. 건물은 세워짐과 동시에 공간이 형성되고 그 안에서 활동하거나 생활한 사람들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시대를 관통하는 타임라인을 형성하며 사람들에게 회상되어진다.
예술작품이 창작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작가와 함께 회자되듯, 건물 혹은 거리 등 하나의 공간으로 인식되는 곳 역시 오랜 기간 한자리에 있으면서 인물과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서 기억으로 축적되고 회상된다. 지역의 근대 문학자료를 수집하면서 당시의 문학인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인들은 지역에 경계를 두지 않고 서로 교우(交友)하였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예술 분야와 다른 분야의 예술인들과도 서로 활발하게 교류(交流)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개인과 개인, 장르와 장르 간의 상호 연계성을 발견할 수 있는 공간이 서성로와 북성로, 향촌동 일대인데, 이곳들은 대구의 근대 문화예술이 잉태되고 태동한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06년 대구읍성이 허물어지면서 성벽을 따라 서성로, 북성로 등의 신작로가 만들어지고, 1920년대 이후 북성로에 잡화점, 양화점, 다방들, 백화점 등의 새로운 상권이 생겨나는 것과 맞물려 모던세대, 이른바 1920년대 중반에서 1930년대 중반 식민지 경성의 도시공간에 나타난 새로운 스타일의 소비 주체들이 지역에서도 등장하여 새로운 문화를 양산하였다. 아울러 북성로 일대는 문화예술가들이 서로 교류하는 사교 공간으로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이상화, 현진건, 이장희, 이효상, 윤복진, 박태준, 이인성, 이육사, 현제명, 신동집 등 많은 문화예술인들의 생가와 거주지, 문화예술인의 후원, 교류의 장이었던 무영당백화점, 작품 '빈처'의 모티브가 된 현진건의 처가, 전쟁기 문화예술의 사교적 공간인 여러 다방들이 많이 존재했었다.
1937년에 신축한 어느 5층 건물도 현재까지 남아있다. 개성 출신의 이근무가 서점을 시작한 후 사세가 커짐에 따라 확장하였다. 이근무는 이상화, 이인성, 박태준, 김용조, 윤복진 등 지역의 작가 및 문화예술인들과 교류하여 이 공간을 지역 문화행사인 향토회전과 문화예술인들을 위한 살롱, 작품발표회장으로 후원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의 일기가 대중잡지 '삼천리'의 1933년 10월호에 소개되었는데, 이를 통해 근대 문화예술이 꽃피운 향촌동의 한 단면을 유추해 볼 수 있게 한다. 혹여 지금이라도 알려지지 않은 이근무의 일기가 발견된다면 당시 예술인의 교류 모습을 더 세밀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개발로 당시의 기억을 간직한 대부분의 건물들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몇몇의 건물과 허물어진 건물의 터에 세워진 간단한 안내문으로만 영화로웠던 모던의 시기는 회자되고 있다. 근대의 사라진 기억들은 뒤로하고, 현재 남아있는 건물이라도 잘 보존하여 지역의 문화예술이 발현했던 공간의 기억을 아카이빙한다면 문화도시 대구의 미래가치는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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