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취재현장] K-방역의 뚫린 구멍

故 정유엽 군의 사례가 던지는 메시지, '의료공백'
감염병 재난 속 국가 역할, 방역 이상으로 확장돼야

신중언 사회부 기자
신중언 사회부 기자

"지금 아프면 정말 큰일인데."

대구에서만 하루 확진자가 적게는 수십, 많게는 수백 명씩 생기던 지난 2월과 3월 대구경북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해본 걱정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병상과 의료 인력이 부족하다' '확진자가 발생해 상급병원 응급실이 폐쇄됐다'는 보도들이 쏟아지던 때였다.

응급환자가 제때 치료받지 못하는 '의료 공백'이 발생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 섞인 목소리도 더러 나왔지만 중요하게 다뤄지진 않았다. 대부분은 혼란한 시기에 아프지 않았다는 '행운'에 안도할 따름이었다.

3월에 들린 고(故) 정유엽 군의 사망 소식은 우리가 그저 안도하고 지나쳤던 의료 공백 문제를 눈앞에 드러내 보였다. 유족들에 따르면 3월 10일 갑작스러운 고열 증세에 시달리던 정 군은 사흘 뒤 인근의 경산중앙병원을 찾았지만 '코로나19 검사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했다.

다음 날 오전 다시 병원을 찾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의료 공백 속에서 정 군의 병세는 점차 악화됐고 결국 같은 달 18일 세상을 떠났다. 그 사이 정 군이 10여 차례 받은 코로나19 검사 결과가 나왔다. 모두 '음성'이었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정 군과 비슷한 일을 겪은 사례는 더러 있었다. 2월 말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대구 남구에 사는 46세 남성 A씨의 글이 올라왔다. 기침과 미열 증세를 보이던 A씨는 보건소에 상황을 설명했지만 돌아온 답변은 "신천지 교인도 아니고 해외여행도 다녀오지 않았으니 자가격리하라"는 것이었다.

사흘 뒤 열이 더 오르는 등 증세가 심해진 A씨는 보건소에 선별진료소 방문 의사를 전했다. 하지만 보건소는 "체온이 38℃가 넘어야 선별진료소에 갈 수 있다"며 재차 자가격리를 권했다고 한다. 이틀 뒤 A씨는 39도의 고열로 쓰러졌고 대구의료원 선별진료소에서 폐렴 판정을 받을 수 있었다. A씨의 코로나19 검사 결과도 '음성'이었다.

한밤중에 맹장염 증세가 나타나 응급실을 찾았지만 체온이 38도까지 올라 제때 수술을 받지 못할 뻔한 경산의 대학생 이야기도 있다. 지난 3월 그는 자신을 받아주는 병원을 전전하고 코로나19 검사 결과가 나오는 걸 기다리느라 수술을 받기까지 14시간을 통증 속에 허비해야 했다. 국가의 지침을 잘 준수한 이들이 이처럼 각자도생의 길로 내몰렸던 것이다.

지난 2월과 3월은 비감염병 환자도 위태로운 시기였다. 동시에 이들 모두를 잘 치료할 수 있는 의료시스템이 우리에겐 없음을 알려준 시기였다. 특히 고 정유엽 군의 사례는 우리에게 국가의 역할이 단순한 치료와 방역 등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보건소와 병원이 명확한 운영 방식과 기능 등을 정립하고 대응 매뉴얼을 만드는 것 역시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고 정유엽 군 유족들이 지난 3개월간 주장한 바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기자는 이달 16일 정 군의 부모와 정유엽사망대책위원회가 청와대로 기자회견을 하러 가는 것을 동행취재했었다. 버스에서 유족과 나눈 대화 중에서 가장 가슴을 후벼팠던 건 "아들의 죽음이 개인의 불행으로 취급당할 때가 가장 힘들다"는 정 군 아버지의 말이었다.

이들이 계속 싸우는 건 피해자의 위치에서 동정받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의료 공백의 문제를 드러내고 개선할 수 있다면 "임종조차 지켜주지 못한 아들에게 조금이라도 덜 미안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많은 이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K-방역은 이런 의료 공백 문제까지 돌아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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