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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 인성교육진흥법, 그 후

이덕형 경북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이덕형 경북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이덕형 경북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건전하고 올바른 인성을 갖춘 국민을 육성하여 국가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2015년 7월부터 시행된 '인성교육진흥법' 제1조(목적)다. 잊어버리고 있다가 이번 1학기 강의 참고용으로 찾아봤더니 여전히 시행 중이었다. 인성을 '세계 최초'라는 법으로 함양하겠다는 과감한(!) 발상에 지금도 놀란다. 과문 탓인지 이 법이 국민의 '건전하고 올바른 인성' 함양에 기여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가 없다. 법이 인간의 격까지 높일 수 있다고 믿는 풍토에 일침을 가하고 싶어진 이유다. 국민의 품격을 근본적으로 높일 방도는 없는가.

독문학도로서 필자는 200여 년 전 괴테와 실러의 독일 고전주의가 내세운 '인간의 미적 교육'을 독문학사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는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인류사의 찬란한 일출"(헤겔)에 독일 지식인들도 열광했다. 그러나 혁명이 유혈참극으로 화하자 열광은 혐오로 변한다. 늦어도 '죄인 500명이 죄 없는 50만 명을 구한다"는 인민재판식 선동에 따라 며칠 만에 천 수백 명의 목이 잘려 나간 1792년 '9월학살' 이후 괴테와 실러는 '독일적인' 사회개혁 방법론을 심각하게 고민한다.

"모든 계몽은 인간의 성격에서 나온다. 정치 영역의 개선도 개인의 성격을 고귀하게 만드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1795년 실러의 '인간의 미적교육론' 핵심 구절이다. 개인의 성격, 곧 인성이 사회발전의 출발점이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개인의 성격을 어떻게 고귀하게 만든다는 것인가? '아름다운 예술'을 통해서였다. "아름다운 예술이야말로 깨끗하고 순수한 마지막 샘물"이기 때문이다. 문학을 포함한 예술은 인간의 의식을 서서히, 그러나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유독 독일 사회가 문학과 예술을 통한 인성의 고양을 중시하게 된 배경이다. 독일 사회의 보수성을 보여주는 대목이지만, 보수성은 사회적 안정성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독일에는 현재 38개 국립극장, 28개 주립극장, 92개 시립극장이 경쟁적으로 수준 높은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으며, 매년 4천만 명 이상이 극장을 찾아 연극, 오페라, 음악회 등을 즐긴다. 놀라운 것은 극장 운영자금이다. 미국은 개인이나 사기업에, 영국은 복권판매 수익금 등에 의존하지만, 독일은 대부분 공공예산이다. 정신문화를 국가와 공공기관이 보존해야 한다는 철학이 확고하게 자리 잡은 덕이다.

언필칭 한국은 세계 10위권 경제대국, K팝 문화강국임을 자랑한다. 그럼에도 흔쾌히 선진국 반열에 든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법제도로 국민의식을 조금은 끌어올릴 수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거기에는 국민의 품격이 국가 이미지로 이어지고, 국가 이미지는 국가 경쟁력으로 연결된다는 고도의 전략적 사고가 자리 잡을 틈이 없다. 필자는 이 나라의 책임 있는 정책입안자들에게 법이 아닌 문화예술로 승부하는 독일 문화정책의 느림의 미학을 눈여겨보라고 권하고 싶다. 몸에는 역시 슬로푸드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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