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순의 촌로(村老)는 평생 못 해본 일이 하나 있다. 몇 살 덜 먹은 아내는 딱 한 번 경험했다. 스물두 살 되던 해 코 닿을 거리에서 시집온다고 이사(移徙)를 맛봤다. 그러고는 평생 그 자리서 늙었다.
자식은 젊어서 이사를 했다. 학교와 직장을 찾아 도회지로 떠났다. 이들에게 '이사'는 고립을 벗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노부부(老夫婦)는 세상을 등질 때까지 해서는 안되는 금기(禁忌)처럼 여겼다.
코로나19는 이사 없는 마을까지 잘도 찾아왔다. 백발의 동무들은 노닥이던 마을 회관을 떠났다. 코로나는 뜸했던 자식 발길마저 잘라냈고 마을은 더욱 적막해져 갔다.
고목도 꽃 필 날이 있다 했던가. 촌가마다 공짜 돈이 생겼다. 자식들이 오지 않는 대신 코로나 긴급생계지원금이 왔다. 가지(子女)가 많아야 모을 법한 용돈만큼, 목돈이 들어왔다. 한동안 넉넉했다. 코로나가 자식보다 나은 '효자'라고 입을 모았다.
굴뚝마다 고기 굽는 냄새가 배었다. 윗마을 아랫마을 할 것 없이 동네 개들이 킁킁대며 혀를 낼름거렸다. 무섭긴 해도 코로나는 사람이나 개나 모두에게 좋았다.
문제는 그 한철이 지나서 생겼다. 통장을 빼꼼히 들여다보던 눈은 '또 목돈을 언제 주느냐'에 멈췄다. 쟁기와 호미는 진작에 놓았다. 코로나가 코와 혀를 마비시킨다더니, 만원에도 벌벌 떠는 촌로는 이제 큰돈 아니면 쳐다도 안 보게 됐다. 이제나저제나, 코로나 지원금만 기다리고 있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수천억원대 비자금을 만들었다. 세간은 천문학적 규모라며 입을 떡 벌렸다. 이제는 수천억원에 경악하는 사람은 없다.
코로나가 발생하기 전까지만 해도 대구경북 통합신공항 건설 비용 10조원이란 예산에 찬사(?)를 쏟아냈다. 단군 이래 최대 공사, 20년간 먹고살 재원…. 하지만 불과 몇 달 만에 10조는 명함도 못 내밀게 됐다.
코로나 뉴딜에 500조, 국민기본소득 120조, '조'(兆) 단위는 이제 100단위쯤은 되어야 맛이 난다. 코로나가 '1조'를 '껌값'으로 만들었다.
1조가 얼마나 큰돈인가. 6천원짜리 자장면으로 온 국민이 삼시 세끼를 해결하고도 1천만 명은 또다시 야식으로 먹어야 하는 금액이다. 장당 0.97g 나가는 5만원권 지폐는 1톤 트럭으로 열아홉 대 하고도 반 차를 더 실어야 1조가 된다.
정치권은 대한민국의 40%대 부채 비율을 낮다고 보고 있다. 60%도 괜찮다고 한다. 10% 증가할 때마다 200조가 생겨난다니 20% 올리면 공돈 400조원을 만들 수 있다. 부채 비율이 한국은행 이자 도깨비방망이와 진배없다.

미국·일본·유럽은 세계에서 통용되는 돈을 찍어내는 나라다. 물이 있는 고무 대야에 소금을 더 타고 빼고 한들 물과 소금이 어차피 이들 나라 것이라 농도는 문제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하지만 기축통화 '기침'에 감기 몸살을 앓는 우리나라는 그럴 수가 없다. 소금값은 언젠가는 치러야 한다.
국제 신용평가사들은 한국 부채 비율의 마지노선을 46%로 보고 있다. 정부와 정치권은 그런데도 '아전인수'(我田引水) 통계를 들고 부채 비율 높이라며 '염전'(鹽田)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앞으로 '1조, 10조밖에 안 드네' 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나. 코로나 청구서는 곧 날아든다. 서서히 나타나 '나와 상관 없는 일이야'라는 착시현상이 뒤따르겠지만, 연착하는 기차처럼 반드시 온다. '이사 없는 마을'까지 잘도 찾아온 코로나의 진짜 무서움은 바로 돈에 대한 무감각증(症)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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