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같이 어두운 어느 그믐날 밤이었다. 자정을 훨씬 넘긴 삼경쯤이었을까? 나는 할머니와 큰방에서 곤히 자고 있을 때였다. 밖에서 어머니의 울음소리에 잠을 깬 나는 청천벽력과 같은 비보를 접해야만 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 "신이여! 한 말씀만 하소서!"
옆에서 함께 잠든 줄 알았던 할머니는 문고리를 잡고 경북대학병원에 형의 수술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뜬눈으로 소식을 기다리는 할머니의 심정은 오죽 했을까?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땐, 할머니는 이미 실신한 후였다.
어머니, 아버지, 삼촌 셋은 할머니의 전신을 주무르고 계셨다. 바늘을 가져와 사족을 따고, 아버지는 찬물을 입에 물고 할머니 얼굴에 내뿜으셨다.
애지중지 키워오던 천금 같은 맏손자를 잃은 슬픔은 어찌 말로서 다할 수 있을까?
생때같은 손자를 하루아침에 떠나보낸 할머니는 식음을 전폐하고 망연자실하시어 울음조차 내지 못하고, 간혹 한 번씩 외마디 비명만 낼 뿐이었다.
졸지에 아들을 떠나보내고 신이여, '한 말씀만 하소서!'란 어느 유명작가의 글이 뇌리를 스쳐갔다.
이 뿐이랴?
*허난설현이 생때같은 아들 둘을 연년으로 잃고 '곡자'라는 시를 쓴 생각이 내 머리를 후려 갈겼다.
형의 사망
지금은 슬픔이 너무도 오래되어 망각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내 인생에 그날의 비극적인 드라마는 두 번 다시 연출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신이 인간에게 준 최대의 선물이 '사랑과 망각'이라면 기쁠 때의 사랑을 오래 기억에 남게 하는 것과, 슬픔을 빨리 잊게 하는 망각뿐이라고 생각된다.
바야흐로 지금은 슬픔이 하도 오래되어 내 기억에 멀어져만 가고 있지만, 내가 한창 신경이 예민한 중3, 사춘기 때였다.
경북 의성군 다인면 달제동 789번지가 나의 안태고향이다. 동네 뒷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북풍을 막아 주었고, 산이 높아 골짜기에서 흐르는 냇물은 저수지가 없었던 시대에는 농사짓기에 안성맞춤인 농촌 마을이었다.
어린 시절 엄마 따라 뒷산에 산나물을 뜯던 일이며, 친구들과 앞 냇가에 멱을 감고 고기 잡던 시절이 지금 고희를 넘긴 이 나이에도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나는 한국전쟁이 터지기 3년 전에 태어났다. 전쟁이 끝나고 2년이 지난 후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지금도 전쟁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폐허된 전쟁 후라서 불 탄 학교를 학부형들의 부역으로 흙벽돌로 지은 축축한 흙바닥교실에서 가마니 깔고 공부를 했다.
난로는 없었고, 창호지를 바른 창문에 유일한 햇볕이 들어와 교실의 온기를 채워주었다.
가마니 틈 사이에서 습기가 올라와 손이 시려서 글씨를 쓸 수가 없었다. 방석이라도 있었다면 엉덩이는 따뜻했을 텐데, 전쟁의 잔재는 참혹했다.
집에서 학교까지 거리는 왕복 4km나 되었으며, 교실이 모자라 저학년은 오전수업으로 끝냈고, 오후는 고학년이 2부제 수업을 했던 기억이 난다.
교복은 없었고 무명에 솜 넣어 만든 한복을 입고 다녔다. 검정 고무신에 책보자기를 여학생은 허리에, 남학생은 어깨에 메고 다녔다.
필통 속에 연필은 자주 부러져 학교에 와서 칼로 깎아서 사용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와서 식은 밥 한 덩어리를 물에 말아 먹으면 꿀맛이었다.
제일 두려웠던 것은 상이군인아저씨와 문둥병 환자가 동냥을 달라고 할 때 혼자 집에서 벌벌 떨고 숨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의 유산을 이어받은 우리 집은 동네에서 세 번째로 큰 부자였다.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위로는 형님, 나, 남동생, 여동생 둘, 3남2녀로 화목한 가정이었다.
당시 맏손자인 형님은 공부를 잘해 경북대학 수의학과 1학년이었고, 나는 중3 때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아버지가 일자무식이었기에 우리 집안의 어른이신 할머니는 5남매 손자들에게 공부시키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특히 맏손자인 형님에겐 특별한 사랑을 했던 것 같다.
당시 우리 3형제는 학교에서 공부를 잘해 상장을 많이 타와 할머니는 동네에 손자자랑으로 즐거움을 대신했다.
할머니께서는 장래에 맏손자는 대통령, 둘째인 나는 장관감이었고, 셋째 동생은 군수감이라고 늘 손자들에게 꿈을 키워주시던 손자바보였다. 하긴 세 손자가 타온 상장 수 만해도 방안에 도배를 했을 정도로 많았으니까, 자랑할 만도 했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그렇게 잘나가던 우리 집도 옛집을 허물고, 새집을 짓고부터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그렇게 건강하시던 할머니와 아버지도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일 큰 충격은 우리 집의 대들보와 같았던 맏손자인 형이 수술에 실패하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흔히 남의말하기 좋다고 새집지은 그 집에 대들보가 부러졌다고 웅성웅성 화젯거리가 되기엔 충분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어머니께서는 용한 무당을 데려와 새집에 악귀가 붙어 그렇다고 굿을 3일간이나 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 집 대들보와 같은 맏형은 경북대학 수의학과에 합격하여 장학금을 타며 우등생으로 공부를 잘 했었다. 할머니께서는 형님이 대학에 합격했을 때 동네방네를 다니며,
"우리 손자가 경북대학에 1차로 당선 되었다니더!"라고 해, 동네사람들에게 웃음거리로 풍자되기도 했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세월은 흘러 고희를 훌쩍 넘긴 나이가 되었으니, 어찌 필설로 다하리오!
평소에 형님은 기침을 자주했다. 그래도 폐가 좋지 않아서 그런 줄 알고, 할머니와 어머니는 이 세상에 기침에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였고, 먹은 약만 해도 수 십 짐은 됐다고 하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에는 의술이 발달하지 못한 것도 있겠지만, 정확한 진단을 못해 약을 잘못 쓴 것도 큰 원인이었으리라!
형은 당시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공부방이 없어 사랑방에 할아버지와 같이 기거했고, 나는 어려서 큰방에 할머니 곁에 잤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할아버지 담배연기에 간접흡연의 결과로 기관지가 나빠졌을 거라고 판단된다.
형은 대학에 들어가서 수의학을 전공했다. 가축 중 특히 소에 대하여 공부를 많이 해 본인의 병이 기관지 확장증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흉부외과 교수님과 여러 번 상담을 하고 최종 수술은 형 본인이 결정했던 것으로 짐작이 간다. 당시 집도의 말에 의하면 99%는 성공이고, 1%는 실패할 수 있다는 확답을 받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형은 기관지 확장증이란 병명으로 수술을 실시했으나, 그 결과는 실패율 1%에 희생된 장본인이 되고 말았다. 사고 후 아버지와 가족들은 의료사고로 판단하고 시체부검을 의뢰하려고도 했으나, 다 부질없는 일이라고 포기하고 화장하여 뼛가루를 낙동 강물에 뿌리고 귀가했던 것이다.
그 날 밤 형의 비보를 듣고 실신한 할머니는 새벽녘에야 깨어났다.
나는 밤이 새도록 할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고, 그 당시의 상황을 어찌 필설로 다 하겠는가 만은, 내가 철이든 중3 때 겪은 일이었기에 지금도 생생하게 그 때의 상황을 말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3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물만 숟가락으로 떠 넣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다가온다.
사람이 울고 싶을 때 엉엉 울 수 있으면 얼마나 행복할 수 있을까를 그 때 할머니를 보고 알 수 있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 중처가 맺히면 울음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할머니는 천장만 바라보고 "우~우~"하시며 마치 늑대가 새끼를 잃고 우는 것처럼 보였다.
차라리 울음이라도 크게 울 수 있으면 가슴만이라도 시원할 텐데….
그 이후 할머니는 한 달 동안 문밖출입을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손자자랑에 동네를 누비던 할머니는 1여 년간 동네 출입도 하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기엔 1년이 지나자 마당에 나와 먼 하늘을 바라보며 "후유~" 하고 한숨만 내쉬며 아픈 가슴을 스스로 치유하고 계셨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이 있듯이 가장 아끼던 맏손자를 먼저 앞세운 할머니의 심정이야 오죽했으랴!
'단장(斷腸)의 아픔'이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듯이 '*허난설헌'이 자식 둘을 잃고 비통에 빠져 '곡자(哭子)'라는 한시로 회자됨을 비유한다면 그날, 할머니의 착잡한 심정을 대신하는 가장 적절한 표현이 아닐는지….
* 허난설헌(許蘭雪軒),1563~1589): 본명은 초희(楚姬). 난설헌은 호. 조선중기 문한가로 허균의 누나이다.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나, 개인 및 시대, 사회적인 불운으로 인해 27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사진 설명
1. 필자의 할머니
2. 필자의 넷째 여동생(왼쪽), 필자의 할머니(가운데), 필자의 다섯째 여동생(오른쪽)
3. 필자의 고등학교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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