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20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대상- 손자바보/ 김태호 ④·끝

김태호
김태호

◆반전

형의 수술 실패로 본의 아니게 맏이가 된 나는 대학의 꿈을 접은 채 아버지를 따라 들에 나가 농사일을 거들기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밤이었다. 할머니는 전 가족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께 불호령을 내렸다.
맏이가 된 나에게 공부는 안 시키고 농사일을 시킨다며 당장 나를 대구에 있는 삼촌 집으로 보내 입시학원에 다니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 이튿날 할머니의 성화에 못 이긴 아버지는 나를 삼촌댁으로 보냈다. 나는 쌀 한 말을 등에 메고 갔다. 재수를 하게 된 것이다. 나는 대구학원에 수강 신청하여 강의를 듣고, 도서관에서 열심히 대입공부를 했다.

농업과목이 60%인 시골 농고에서 국·영·수 세 과목은 40% 밖에 안 배웠다. 도시학생에 비해 기본실력이 없어 기초부터 새로 시작해야만 했다.
재수 반에서 열심히 강의를 들었으나, 무슨 말인지 몰라 도서관에 가서 복습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강의를 들으면 들을수록 강사님의 강의가 귀에 쏙쏙 들어와 재미가 있었다. 워낙 기초가 부족하여 많은 시간을 기초공부에 몰두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1년 재수한 것이 농고에서 3년 공부한 것보다 더 실력을 쌓은 것 같다.

수학이 제일 어려웠다. 영어는 기초가 없어 밑바닥부터 새로 시작해야만 했다. 그 당시 분수의 가감산도 못 했다. 기초실력이 없어 중학생 실력만도 못했다. 학원에서 공부를 차근차근하니 나중에 머리에 입력이 잘 되었다. 입시날을 한 달 남겨두고 독서실에서 잠을 설쳐가며 책과 씨름했다.

드디어 원서를 쓰던 날이었다. 1차는 대구교대, 2차는 상주잠대 2곳에 응시하기로 했다. 2곳의 대학에 모두 합격하는 영광을 안았다. '고진감래'란 말이 실감이 났다.

◆교직의 길을 택하다

2개 대학에 합격해도 어느 곳으로 진로를 선택해야 할 지 갈등이 생겼다. 상주잠대는 도시 학교에 비해 모든 것이 낙후되어 있었다. 가족회의 결과 최종적으로 대구교대를 선택했다.
당시 교육대학은 전면 장학생이었고 졸업 후 발령이 100% 날 때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대학시절은 순탄했다. 돈은 없지만 착실하고 공부 잘하는 학생만 교육대학에 들어왔고 못된 학생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 또한 교직이 적성에 맞아 2년간 큰 고난 없이 동생과 자취하며 대구에서 공부를 마치고 상주 두메산골에 첫 발령을 받았다.

당시 대구 계성고에 다니던 내 동생도 육사, 경북대, 한국해양대 3곳 다 합격했다. 결국은 특차인 해양대를 선택해 졸업 후 외항선 선장까지 하다가 칠순이 가까운 나이에도 해운회사 사장으로 지금도 일하고 있다.

◆'딸딸이' 아빠의 회한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상주의 두메산골 조그마한 학교에 발령을 받았다. 낯설고 물 설은 그곳에서 3년 반 동안 젊음을 바쳤다.
분교에서 독립한 학교였고 학부모의 인심이 좋아 다행히 잘 지내게 되었다. 당시는 교사가 부족하던 때라 군대 영장이 나왔으나 교사 특례 조치로 군대에 가지 않게 되어 4년 간 월급을 차곡차곡 모아 고향에 땅 다섯 마지기를 사기도 했다.

단 한 가지 애로점은 교통이었다. 명절 때 한번 나들이 하는 것이 매우 불편한 때였다.
오지에 위치한 이 학교는 큰 산이 있어 오르막길 10리, 내리막길 10리의 갈령재를 구비 돌아 상주읍까지 가는 데 3시간이나 걸렸다.
다시 상주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낙동강을 건너 안계까지 1시간 반, 안계에서 갈아타고 고향까지 한 시간 남짓하여 정류장에 내리면 고향 동네까지 30분을 또 걸어가야만 했다. 당시 고향은 두메산골이라 전기도 들어가지 않을 때였다.

명절 때 고향에 가면 할머니가 장가들라고 재촉하는 바람에 고향에 가기가 싫었다.
당시는 결혼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더 즐거웠고, 젊은 날의 큰 재산인 추억이기도 했다.
교통이 너무나 불편하여 그 학교에서 3년 10개월 만에 상주읍으로 전출되어 왔다. 상주읍내 학교에서 고학년 담임을 하면서 젊음을 다 보낸 시절이 칠순이 지난 지금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상주읍으로 전근 온 지 4년 만에 할머니 성화에 못 이겨 스물아홉에 상주 처녀와 결혼을 했다.
두 살 터울로 딸 둘을 낳고 앞이 캄캄했다. 부모님은 물론 당시는 손자를 봐야 대를 잇는 다면서 손녀는 아무것도 아닌 시절이었다.
셋째는 아들이었지만, 애석하게도 할머니는 증손자를 안아보지 못한 채 여든 다섯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할머니는 내가 결혼을 하고 셋째 아이가 태어나기 전 두어 달가량 편찮으시다가 노환으로 돌아가셨다.
음력으로 섣달 그믐날 밤에 임종하셨다. 마침 겨울방학 때라서 할머니 병수발을 했다. 임종하실 때 나 혼자만 있었다.
자정이 넘어 아버지는 사랑채로 내려가시고 내가 할머니 곁에서 간호를 했다. 할머니는 속이 탄다며 냉수를 떠오라고 하여 한 모금 마시더니 곧바로 숨을 거두셨다.
흔히 이야기하는 짚불 사그라지듯 소리 없이 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할머니만큼 손자들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정성인 분은 이 세상엔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세월 앞에는 장사가 없다고 했던가.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 54년이 지나갔다. 지금도 그때의 기억을 잊을 수가 없지만, 망각이란 신이 준 선물이 있었기에 온 가족이 이렇게 살아 왔지 않았는가 싶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부부가 할머니의 소원을 풀어 드리지 못한 것이 제일 아쉽다.

분명 고인이 된 할머니는 손자 바보였다. 형의 갑작스런 요절로 맏이가 된 나는 돌아가신 형님의 십분의 일이라도 잘 했었더라면, 할머니의 마음도 후련했을 터인데….
지난날에 비하면 지금은 사회적 인식의 차이가 너무도 많이 바뀌었다. 그 때 공들여 낳은 '고추'가 장가를 가서 연이어 '고추' 둘을 낳았다.
그 고추가 "둘째가 공주였으면 좋았겠는데…"라며 서운해 하더란다.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세상이다.

요사이 항간에 떠도는 우스갯소리가 재미있다. 딸 둘이면 '금메달'이고, 딸 하나 아들 하나면 '은메달', 아들 둘이면 '목매달'이란다. 그리고 딸을 낳으면 비행기 타고, 아들 낳으면 리어카 탄다나?
지금 생각하면, 그 놈의 고추가 뭐길래 그리 안달을 했던가 싶어 웃음이 나온다.

야구 용어로 비유하면 '투 볼 뒤 적시안타'를 친 우리 부부는 득남 작전에 겨우 성공했지만, 다행히 삼남매 모두 가정을 이루어 첫 적시안타를 치는 행운을 잡았고 현재 손자 넷, 손녀 하나를 두고 있다. 앞으로 손자 하나만 더 얻으면 사위들과 '고추가족' 야구팀을 만들어도 될 것 같다. 욕심 같아선 은근히 그런 기대에 부풀어 있다.

세대차이일까, 아무리 '딸딸이'가 득세하는 세상이라고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고추에 마음이 더 가는 것을 어쩌랴.

손자 바보인 우리 할머니는 그렇게 기다리던 증손자를 안아보지 못한 채 눈을 감으셨으니 지금도 마음 한 곳이 휑해 온다.

지금도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손자 바보인 할머니의 잔상이 자꾸만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생각해보면 이 세상 누구보다도 나에게는 잊히지 않는 성모마리아와 같은 할머니였다. 사람의 인성은 어릴 때 교육이 일생을 좌우한다고 한다. 그 옛날 할머니 품에서 잠들며, 옛이야기 들어 주시던 할머니가 몹시도 그립다.


◆이야기를 접으며

일제 강점기 때 밀양박씨 집안의 무남독녀로 태어난 우리 할머니는 비록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 설움을 아들에게 한을 풀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공부에 취미가 없어 농사일에만 몰두했었다.
그나마 손자들에게 풀어보고 싶어 공부를 시켰으나, 갑작스런 맏형의 요절로 할머니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본의 아니게 맏이가 된 나는 형에게 못 다한, 한 맺힌 사랑을 우리 할머니에게 다 이어 받았다.
나 또한 할머니의 곡진한 사랑이 아니었다면 과연 오늘의 내가 있었을까?

고향 이웃면에 위치한 못된 친구들이 우글거리는 농고를 나와 1년 간 재수하고 교육대학을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에 상주의 두메산골 오지학교에 발령을 받아 3년 10개월 젊음을 바치고, 상주읍에 있는 학교에 와서 결혼하고 20여 년간 교사생활을 했다.
손자 바보인 할머니는 내가 결혼하고 딸 둘을 낳은 서른여섯 때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막내아들(증손자)을 안아보지 못한 채…!

나는 할머니의 곡진한 사랑과 젊은 나이에 요절한 형의 몫까지 이어받아 아들 딸 낳고 큰 시련 없이 41년의 교직을 마감하고 퇴직했다. 고희를 넘긴 지금까지 사회에 봉사활동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 오남매 모두 고등교육을 받고 사회에 잘살고 있는 것도 우리 할머니의 곡진한 사랑이 없었다면 과연 이룰 수 있었을까, 의문부호가 남는다.

한 평생을 근면 검소하고 올 곧은 여장부로서 손자들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베푸신 그 은혜를 어찌 필설로 다 하겠는가.

지금 고희를 훌쩍 넘긴 이 나이에 저 세상에서 환히 웃고 계실 우리 할머님께 삼가 명복을 빌며 이야기를 접고자 한다.

사진1=필자의 정년퇴임시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

사진2=필자의 대학원 졸업사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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