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종교칼럼] 지나치지도 넘치지도 않는 행복

유재경 영남신학대학교 기독교 영성과 교수

유재경 영남신학대학교 기독교 영성과 교수
유재경 영남신학대학교 기독교 영성과 교수

얼마나 가져야 행복할까? 도전적인 질문이다. 아버지는 경제학자, 아들은 철학자인 스키델스키 부자(父子)가 오랫동안 함께 씨름한 주제이다. 두 사람은 '물질적 욕구는 충족될 수 있다'고 생각한 케인즈와 달리 '물질적 욕구는 충족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물질적 욕구를 전 문명의 심리적 토대로 만들었다거나 죄의 결과라는 말로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인간은 본성상 필요가 채워지고, 불편함이 사라진다고 해서 만족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하나가 충족되면 또 다른 필요에 목말라하는 존재다.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분투하는 존재인 것이다.

스키델스키 부자는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에서 재화도, 성장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기본재(basic goods)를 구현하는 데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행복한 삶은 끝없이 욕구를 채우는 삶이 아니라 '기본적인 좋음'을 실현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건강' '안전' '존중' '개성' '자연과 조화' '우정' '여가'라는 7가지 '기본적인 좋음'을 제안했다. 두 사람은 행복한 삶이 이러한 '기본적인 좋음'을 구현하며 사는 데 있다고 보았다. 결국 인간의 행복은 끝없는 욕구 충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좋음'에 만족할 줄 아는 '절제'의 삶에 있다.

어느 날, 다른 사람 평가하기 좋아하는 자공이 공자님께 물었다. 선생님, "자장과 자하 중 누가 더 현명합니까?" 공자님이 이렇게 대답하셨다. "자장은 지나친 면이 있고, 자하는 미치지 못하는 면이 있다." 그러자 다시 자공이 질문했다. "그렇다면 자장이 더 현명한 것입니까?" 그러자 공자께서 한 말씀 덧붙이셨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논어-선진' 편에 나오는 공자님과 제자들의 이 대화에서 그 유명한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 '지나치지도 않고 미치지 못하지도 않는' 자기 절제가 곧 삶의 지혜인 것이다. 그래서 불가는 중도(中道)를 이야기하고, 그리스철학과 유학은 중용(中庸)을 논했던가.

창조신학은 기독교의 근간이지만 이에 대한 논의는 깊고 다양하다. 하지만 창조 과정은 인류에게 깊은 통찰과 지혜를 남겼다. 창조 전 이 세계는 공허, 무(nihil)의 세계였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곳에 공간을 마련하셔서, 하늘과 땅을 있게 하시고, 들의 꽃과 풀, 공중의 새를 만드셨다. 하나님만으로 가득한 세계에 다른 존재가 들어온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창조는 하나님이 자기 자리를 타자에게 내줌으로써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를 비움으로써 세계 창조의 공간을 만드셨다. 이것이 바로 '침줌'(zimsum) 즉 '하나님의 자기 제한'(Gods self-limitation) 이론이다. 그래서 기독교의 창조는 하나님의 자기 축소, 자기 왜소화 과정의 발현이다.

요즘 우리는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다. 말의 과잉, 생각의 과잉, 힘의 과잉, 폭력의 과잉 등등, 온갖 것의 과잉이다. 얼마나 더 넘쳐나야 만족할 수 있을까?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 하신 말씀이 시대의 영혼을 울렸으면 좋겠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하나님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볼 것이다."(마 5: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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