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유홍준의 시와 함께] 개망초꽃 여러 억만 송이

개망초꽃 여러 억만 송이 김선굉(1952~ )

낙동강 긴 언덕을 따라 개망초꽃 여러 억만 송이

푸르게 흐르는 강물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다.

고 작은 꽃들이 키를 다투며 마구 피어나서

바람에 몸 흔들며 푸른 하늘을 받들고 있다.

白衣의 억조창생이 한 데 모여 사는 것 같다.

한 채의 장엄한 은하가 흐르는 것 같기도 하고,

흰 구름이 내려와 앉은 것 같기도 하다.

모여서 아름다운 것 가운데 이만한 것 잘 없으리라.

이따금 강바람 솟구쳐 언덕을 불어갈 때마다,

꽃들은 소스라치듯 세차게 몸 흔들며 아우성쳤다.

바람은 낱낱이 꽃의 이름을 불러주었으며,

호명된 꽃들은 저요, 저요, 환호하는 것이었다.

저 지천의 개망초꽃들에게 낱낱이 이름이 있었던가.

바람은 거듭 꽃들의 이름을 부르며 불어가고

꽃들은 자지러지며 하얗게 아우성치는 것이었다.

그 놀라운 광경에 넋을 빼앗긴 내 입에서

무슨 넋두리처럼 이런 탄식이 흘러나왔다.

-詩人은 좆도 아니여!

북천 산골짜기 서너 해 농사를 걸러버린 묵정밭에 개망초꽃이 하얗게 피어 있는 걸 바라본 적이 있다. 그야말로 '한 채의 장엄한 은하'가 피어 있는 광경. 그 흰빛은, 저 평창 달밤의 그것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나는 누군가를 불러 북천의 그 황홀한 광경을 보여주고 싶었다.

오래전 누군가의 생일날, 안개꽃 대신 망초꽃 한 아름 꺾어 꽃다발을 만들어 본 적이 있다. 야생화 꽃다발을 받아 든 그의 환한 웃음을 바라본 적이 있다. 야생화 꽃다발을 바치면 결국 그 사람과 결별하고 만다는 이상한 속설을 알고 있었지만.

꽃은 한곳에 모이면 아름답고 사람은 한곳에 모이면 아름답지 않다. 꽃들에게도 생존을 위한 처절한 경쟁이 있지만 그 생존 전략은 비겁하지 않고 비열하지 않고 정당하다. 사람들이 한곳에 모이는 이유는 대체로 불온하고 불손하다. 관형사 '여러'는 긍정적이기보다 부정적으로 느껴진다. 여러 생각, 여러 마음, 여러 집단, 여러 도시, 여러 관계…. 그런데 이 시의 제목에 쓰인 '여러'는 그렇지가 않다. 「개망초꽃 여러 억만 송이」가 아니고 「개망초꽃 억만 송이」였다면 아마도 이 시는 꽝이었을 것이다.

경상북도 영양군 청기면, 시인의 고향에 가 보고 싶다.

유홍준 시인
유홍준 시인

시인 유홍준:1998년 『시와반시』로 등단. 시집 『喪家에 모인 구두들』 『나는, 웃는다』 『저녁의 슬하』 『북천-까마귀』 『너의 이름을 모른다는 건 축복』이 있다. 시작문학상 이형기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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