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인숙의 옛 그림 예찬] 정선 ‘창범도해’(漲帆渡海)

종이에 수묵담채, 22.7×63.9㎝,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종이에 수묵담채, 22.7×63.9㎝,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인숙 미술사 연구자
이인숙 미술사 연구자

바다 한가운데 돛배 한 척을 그린 부채그림이다. 연푸른 담채의 물빛으로 일렁이는 물결의 부드러운 율동감이 더없이 멋지다. 이 부채로 훨훨 부치면 시원한 바닷바람에 더위가 싹 달아났을 것 같다. 배경이 대범한 대신 배와 인물은 꼼꼼하게 그렸다. 차곡차곡 접히게 그린 돛의 모양과 질감이며, 우뚝한 돛대와 용총줄이며, 이물에 놓인 닻과 닻줄이며, 방향을 조절하는 키와 물속의 따리 등이 자세하다. 선원은 뜸집 위에 줄을 잡고 앉아 있는 돛잡이와 고물에 서 있는 키잡이 겸 선장 두 명이고 선객은 셋이다. 다섯 명의 인물은 자세와 표정까지 세밀하다. 뱃전에 부서지는 고사리 모양의 아기자기한 물보라도 정성껏 그렸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힘 들이지 않고 슬슬 그은 것 같은 물결의 선(線)이 주는 감동이다. 겸재 정선의 독특한 수파묘(水波描)이다. 물 그리는 법을 수파묘라고 하는데 대가들은 모두 고유한 물 그리는 필치가 있다. 산수화는 산과 물을 그리는 그림이라 산봉우리와 언덕, 바위와 나무 등 산 그리는 법 못지않게 바다, 강, 계곡, 개울, 폭포 등 각종 물 그리는 법도 핵심이다. 조영석은 정선의 산 그리는 법, 물 그리는 법이 모두 우리나라 산과 물의 형태를 파악한데서 나왔다고 했다. 정선은 내금강, 외금강을 두루 드나들고 영남의 명승지도 답사한 현장 체험 위에 사용한 붓이 무덤을 이룰 정도였다. 붓 다루는 솜씨를 갈고닦는 일을 흔히 필총(筆塚), 붓 무덤으로 은유했다. 종이나 비단을 스칠 뿐인 붓을 붓털이 닳아 없어지도록(!) 쓰고 버린 것이 무덤처럼 수북하다고 한 것이다. 그런 각고면려와 답사의 체험이 있었기에 "우리나라 산수화는 정선에서 비로소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다"고 한 것이다.

정선은 금강산에서 우리나라 산을 대표하는 산미(山美)를 찾아냈고, 해금강과 관동팔경을 유람하며 동해 고유의 수미(水美)를 터득했다. "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말하기 어렵다"는 관해난수(觀海難水)라는 말이 있다. 정선을 후원한 농암 김창협은 해금강 총석정에서 바라본 동해를 금강산 여행기인 '동유기(東遊記)'에 이렇게 썼다.

'정자에 앉아 동쪽을 바라보니 시야 끝까지 오직 바다뿐 이었다. 내 가슴도 덩달아 잡념 하나 없이 말끔해졌다. 사람을 호연하게 하여 신선이 사는 봉래섬으로 배를 저어 가고픈 생각이 들게 하였다.… 지난번 금강산을 보고 "반평생 보았던 것이 모두 흙무더기나 돌덩이에 불과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동해를 보니 또 반평생 본 것이 모두 도랑물이나 마소의 발자국에 고인 물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창범도해'의 물결은 동해의 장대한 수미(水美)를 한 눈에 체험시킨다. 정선이 물결을 그린 필치, 그의 손끝에서 나온 무심한 듯한 수파묘는 그가 이미지의 진정한 창조자임을 보여준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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