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야구 담당 기자 시절의 이야기다. 대구 시내 모 고교 야구선수들이 집단으로 숙소를 이탈해 팔공산 모처에 숨어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 어린 선수들은 감독의 강압적인 훈련 방식에 반발해 숙소를 벗어났고, 일부 선수는 야구를 포기할 생각까지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학생들이 감독에 반발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자 감독과 학교 관계자, 학부모들은 난리가 났다.
취재가 시작되자 감독과 학교 관계자가 밤늦도록 기자에게 전화를 했던 기억이 눈에 선하다. 부모들이 설득에 나서 해프닝으로 끝나면서 기사화되지 않았지만 스포츠계에 만연했던 비정상적인 훈련 방식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됐다.
눈길을 끈 것은 해당 고교 야구팀은 전국대회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뒀고, 감독은 뛰어난 리더십의 소유자라는 평판이 자자했었다. 성적으로 보면 감독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었다. 한 야구인은 "요즘 이런 일이 발생했으면 정말 난리가 났을 거다"며 헛웃음을 지었다.
경주시청 철인3종경기(트라이애슬론) 팀에서 감독과 선배 선수의 폭언과 폭행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삶을 버린 고(故) 최숙현 선수 사건을 취재하면서 문득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과거 스포츠계에서 폭언과 폭행은 일상적인 일로 간주됐다. 알고도 모르는 척 눈을 감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감독 등 지도자들 사이에 성적을 올리는 가장 쉬운 방법이 폭언과 폭행이라는 잘못된 인식도 많았다.
선·후배 사이 엄격한 규율도 폭언과 폭행의 원인이 됐다. 혈기 방장한 젊은 선수들이 합숙 훈련을 하면서 동료를 향해 폭언과 폭행을 행사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성적에 따른 과도한 스트레스를 동료를 괴롭히면서 해소하려는 왜곡된 모습도 나왔다.
일부 엘리트 종목에서 이 같은 폭언과 폭행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문제점을 인식하면서도 과감하게 틀을 깨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한 사람을 허망하게 잃었다. 최 선수의 일기를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자는데 강도가 들어 날 찔러줬으면…. 길가다 누군가 (나를) 차로 쳤으면…. 이 생각이 수백 번씩 머릿속에 맴돈다.'
체벌과 괴롭힘을 견디지 못한 최 선수가 숙소를 이탈했다가 복귀한 적이 있었다. 감독은 부모가 보는 앞에서 최 선수에게 폭언과 폭행을 행사했고, 심지어 어머니에게 딸의 뺨을 때리라고 강요했다. 아버지는 말했다. "나중에 숙현이를 만나 '많이 아팠니?'(어머니), '안 아팠어'(최 선수), '조금만 참고 견디자'(어머니)는 대화를 나눴다. 그날 숙현이와 아내가 많이 울었다."
감독과 선수의 관계가 아니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보다 못하다. 노예는 주인에게 대가를 지급받지만 최 선수는 돈까지 빼앗기다시피 했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 팀에서 발생했다. 최 선수와 같은 사례가 다른 종목이나 팀에서는 절대 없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솔직히 제2의 최 선수 사건이 터질까 겁이 난다.
문제가 불거지면 호들갑을 떤다. 시간이 지나면 또 잊어버린다. 그러는 사이 제2의 최 선수가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대통령이 나서 철저한 조사와 처벌, 재발 방지를 지시했고,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은 유족을 위로하러 칠곡까지 왔다. 이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최 선수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스포츠계가 문제점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사회적인 감시 시스템을 만드는 것도 꼭 필요하다.
대부분 20, 30대인 꽃다운 청춘들을 지켜줘야 하는 건 우리의 선택이 아닌 의무다. 아무리 좋은 성적도 사람의 목숨보다 귀할 수는 없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기획탐사팀 차장 이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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