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한민국 보수의 길] 2. 젊은 피 수혈 당 쇄신·야성 회복 ‘잃어버린 10년’ 극복

한나라당 15년 역사…1인 독선·계파 싸움 ‘발목’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 2017년 3월 10일 청와대에서 대화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 2017년 3월 10일 청와대에서 대화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2004년 3월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이 당 현판을 천막당사로 옮기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2004년 3월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이 당 현판을 천막당사로 옮기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1997년 11월 21일 신한국당과 꼬마 민주당의 합당으로 탄생한 한나라당은 '87 체제' 출범 이후 정당으로선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한다. 당 명칭에 '큰', '깨끗한', '하나의', '한민족의'이라는 함의가 담겼지만 이름과 달리 질곡의 길을 걸었다.

출범 직후 치러진 15대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가 고배를 들면서 10년 야당 생활의 첫발을 뗐다. 이때만 해도 당내에서조차 한나라당이 14년 3개월 동안 존속할 수 있으리라고 본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개혁소장파가 이끈 외연 확장

'개혁소장파'를 빼고 최장수 정당이라는 역사를 쓸 수 있었을까. 이들은 이회창 총재와 박근혜 대표 아래서 정국의 고비마다 비판의 목소리를 내며 당의 변화를 이끌었다. '절반의 성공'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당의 신선한 자극제로 작용하며 중도층으로 외면을 확장하는 데 기여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의미심장한 것은 이 총재가 주도한 2000년 16대 총선 공천을 계기로 개혁소장파의 목청이 커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 총재는 공천에서 TK(대구경북) 맹주인 김윤환·이기택 고문, 당내 최다선인 신상우 국회부의장 등 현역 의원 중 24명을 날렸다. 대신 오세훈, 원희룡 변호사 등 자신이 직접 영입한 386 신진과 측근들을 대거 전진 배치했다. 계파 보스들을 몰아냄으로써 친정체제를 구축하려는 의중이었지만 역설적으로 당에 새 피가 수혈되면서 쇄신의 바람을 불러 일으킨 계기가 됐다.

개혁소장파들은 앞서 15대에 여의도에 입성한 남경필, 정병국 의원 등과 의기투합해 16대 때 '남원정'(남경필·원희룡·정병국 의원)을 중심으로 한 미래연대를 만들어 활동했고, 새정치수요모임(17대), 민본 21(18대), 경제민주화실천모임(19대) 등으로 이어졌다.

17대 총선에선 중진에 대한 대폭 물갈이를 주도해 최병렬 대표를 비롯한 현역 및 당협위원장 60며 명의 탈락을 이끌어냈고,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엔 '여당 내 야당'의 역할을 했다. 2012년엔 차기 대권 유력 주자였던 박근혜 당시 의원을 향해 공개적으로 변화를 촉구하기도 했다. 한계도 분명했다. 비판을 뛰어넘는 대안과 비전으로 획기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점에서다.

박성민 정치컨설턴트는 "한나라당은 그나마 소장개혁파들이 당내 수구적 보수와 맞서면서 외연 확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이라며 "보수 정당에서 20대 이후 그런 움직임이 거의 사라졌다"고 말했다.

◆'양날의 검'이 된 독주

한나라당이 2004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역풍으로 바람 앞의 등불 신세가 된 뒤 '천막당사'를 통해 극적인 돌파구를 찾은 것도 오늘날 보수로선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대목이다. 위기 상황일수록 '생즉생 사즉사'(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의 자세와 각오가 절실하다는 얘기다.

이 총재와 박 대표의 '카리스마'는 양날의 검이 됐다. 조순 총재를 시작으로 이회창, 서청원, 박희태, 최병렬. 박근혜, 김영선, 강재섭, 정몽준, 안상수, 홍준표 체제가 들어섰지만, 이 총재와 박 대표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둘은 강력한 리더십으로 보수의 '잃어버린 10년' 공백을 채워 나간 게 사실이다. 이 총재는 안보와 법질서 확립이라는 정통보수를 기치로 김대중 정부의 '검찰총장 부인 옷로비 의혹' 같은 여러 비리와 부패 사건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다른 계파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지만 새 인물들을 정치권에 발탁하는 데도 앞장섰다.

박 대표는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2005년 12월 여당인 사립학교법 개정안을 직권상정해 처리하자 곧바로 장외 투쟁을 선언하고 거리로 나서 사학법 재개정 논의를 이끌어냈다. 체질적으로 전투력이 취약하던 한나라당으로선 고무적인 일이었다. 이런 투쟁력에 힘입어 1년 뒤 지방선거에선 압승을 거두기에 이른다. 앞서 2004년 "쇼 아니냐"라는 비판 속에서도 '천막당사'를 통해 당을 살린 것도 그였다.

그러나 '제왕적 총재', '공주'라는 별명에서 보듯 지나친 독주는 부메랑이 됐다. 당내의 다양한 이견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개혁소장파 이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게 됐다. 철저한 자기비판과 자정 노력을 바탕으로 당의 혁신과 변화를 추구하는 움직임이 사라지면서 돌아온 건 국민 불신이었다.

당내의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이 자산으로 활용되기는커녕 계파 분화의 요인이 된 점도 돌아봐야 한다. 2007년 대선 경선을 둘러싼 이명박 박근혜 후보 간 갈등과 대립은 분당 직전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17대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당선시키며 정권탈환에 성공했지만 2007년 대선 경선 과정에서 있었던 친이(이명박)계와 친박(박근혜)계의 쌓이고 쌓인 앙금은 두고두고 불씨가 됐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승리했다고는 하나 속을 들여다보면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한나라당은 행정수도 이전을 둘러싼 계파 간 전면전 끝에 2010년 지방권력을 내준 데 이어 2011년 서울시 무상급식 투표 무산 등 악재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자 2012년 2월 10일 새누리당으로 당 간판을 바꾸기에 이른다. 이를 전후해 이념적으로 자유주의에서 수구적 보수주의로 회귀 색채가 뚜렷해지고, 지역적으로는 TK로 지지층을 좁히는 결과를 초래하면서 4차례 주요 선거에서 연속 패배했다. 초유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 사태도 빚어졌다. 그 뿌리인 미래통합당은 여전히 활로를 찾지 못하고 있다.

김형기 경북대 명예교수는 "정책이나 이념 이전에 기득권·웰빙 이미지로 인해 보수정당에 대한 비호감이 대단히 높다"며 "절실하고 진정성 있는 의지와 쇄신으로 혁신적 중도주의를 지향할 때 수도권·젊은층 등으로 외연을 넓힐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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