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으로 세월이 물 흐르듯 빠르게 지나간다. 내 나이도 어느덧 불혹을 지나 중년의 나이인 50대에 접어드니 아버지가 살아생전의 모습이 그리워진다. 왜 그럴까? 나에게는 그렇게 엄하셨고 무서웠던 분이셨는데...자식을 키워보니 철이 들었는 것일까? 아니면 나이가 먹으니 아버지를 이해하는 마음이 생긴것일까? 정말 보고 싶다. 아버지 김정규 그대가 그립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전남 승주군 상사면 도월리 산정마을이라는 골짜기에서 태어나셨다. 6·25전쟁으로 인해 가족 모두 순천으로 피난을 왔다고 한다. 당시 3남1녀 중 막내로서 학업은 커녕 어린 나이에 지게를 메고 산에 가서 땔감을 구해오는 등 궂은 일을 도맡아서 하셨다고 한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가족 중 유일하게 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를 하는 바로 위 형님(큰아버지)의 모습과 항상 땔감을 하러 갈 때마다 마주치는 학생들의 모습이 너무 부러웠다고 한다.
그래서 부모님께 공부를 하고 싶다고 몇 달을 매달렸다고 한다. 넉넉한 가정은 아니였지만 아버지의 공부 열망은 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12살 나이에 순천 남국민학교 5학년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한글, 숫자 등 하나도 모르니 처음 몇 달간은 학교 적응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포기하지않고 형님의 도움으로 공부에 매진한 결과 성적우수학생으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순천의 명문학교인 매산중고등학교를 나왔다.

당시 매산고등학교는 웅변부가 전국에서 유명했다고 한다. 아버지도 웅변부에 입문했다. 공부도 잘하셨지만 웅변은 당시 지역은 물론 전국을 휩쓸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서울대 법대를 도전하였으나 실패하고 바로 위 형님께서(큰아버지) 당시 계명대 교육학과 재학 중인 관계로 그 영향을 받으셔서 대구로 오시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는 영남신학대학교 입학해 신학 공부에 매진하셨다.대구에서 아버지와 큰아버님은 대구신성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셨는데 당시 교회설립자이신 외할아버지 장녀인 어머니와 만나게 되면서 결혼까지 골인하셨다.
아버지는 70년대 중반 대구에서 총선 출마 캠프까지 꾸렸으나 고향이 전라도라는 인식 에 포기하셨다. 본인의 정치 꿈은 제대로 펼치지 못하셨지만 이 곳 대구에서 최초의 웅변학원 설립과 지역의 굵직한 활동들을 많이 하셨다.
아버지의 철학은 "나는 배가 고파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배불리며 살아야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근면, 정직, 봉사" 생활신조를 가지고 한평생을 지역사회 봉사와 국가사회교육 그리고 웅변 스피치 문화에 기초를 쌓으셨다.
살아생전 아버지께 감사와 사랑의 표현을 제대로 못한 것 같다. 지금까지 이렇게 성장하고 삶에 큰 역할을 해 주신 아버지 감사드립니다.그리고 사랑합니다. 아버지의 아들이라 자랑스럽습니다.
불효자 김태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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