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의 그림 중에 '감자 먹는 사람들'이란 그림이 있다. 흙 때 묻은 손을 한 사람들이 칙칙한 배경의 불빛 아래 둘러앉아 감자를 나눠 먹는 모습이다. 그림은 16세기 스페인 군대의 남미 원정으로 유럽에 처음 전해진 감자를 농사지어 먹던 농부들의 저녁 식사 모습을 보여준다.
영국 옆에 위치한 섬나라인 아일랜드만큼 감자에 관해 슬픈 역사를 가진 나라가 있을까. 영국의 식민지였던 그곳에서 감자는 국민들의 주식이었다. 속국으로부터 생산되는 거의 모든 농산물을 갈취해 가던 영국의 수탈 품목에 감자는 제외돼서다.
악마의 열매라 부르며 기피하던 땅속에 남은 유일한 목숨 줄. 그마저도 잎이 마르는 돌림병에 의해 전멸하고 만다. 그것으로 1845년부터 시작해 7년간 이어진 대기근 동안 굶어 죽은 아일랜드 사람이 백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굶주림에 본국을 떠난 이들도 백만 명. 전체 인구의 25%가 사라진 셈이었다.
감자가 전멸한 주된 이유는 돌림병 때문이지만 경작하던 감자가 한 종류인 탓도 있었다. 만일 그곳에 오랜 기간 자생해 오던 다양한 종류의 감자가 있었더라면 상황은 훨씬 덜 심각했을 것이다. 볼품없이 작아도 가뭄이나 추위, 역병 같은 급변하는 환경에서 살아남은 그들이야말로 사정이 어려워지면 꺼내 쓸 수 있는 유전자 저금통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오며 가며 지나다 보던 눈에 띄는 가건물에 들어가 볼 기회가 생겼다. 씨앗이라고 쓰여 있는 그곳에는 시를 쓰며 농사를 짓는 시인이 살고 있었다. 비록 몇 마디 얘길 나눠보진 못했지만 요즘 많이들 재배하는 씨 없는 포도 대신 30년 된 포도나무를 가꾼다는 그분은 씨앗에서 시가 나오는 삶을 살고 있는 듯했다.
씨 없는 포도는 지베렐린이라는 식물 생장 호르몬을 사용해 만든다. 꽃이 활짝 피기 전 봉오리 상태일 때 지베렐린을 발라주면 암술과 수술이 미처 성숙하기 전에 꽃이 피게 되어 씨앗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여기에 다시 지베렐린 처리를 하면 씨 없는 상태에서 과육이 자라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포도는 크기가 클 뿐 아니라 식감이 좋고 맛도 달다.
씨 없는 과일은 씨앗의 존재 이유를 인간의 미각을 위해 우회시킨 농사 기술의 혁신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산들거리는 바람에 작열하는 태양을 맞으며 씨를 품고 서서히 익어가는 자연의 섭리에 비할 바 아니라는 게 씨앗을 지키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씨앗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처럼 예측 가능한 것이다. 속삭이는 바람만큼 가녀린 날갯짓으로 만들어지는 자연의 선물 같은 것. 가장 때깔 좋고 실한 놈을 골라 대대손손 물려주는 가보 같은 것이다. 그러한 씨앗 중에 씨앗 아닌 씨앗 같은 씨앗이 있다.
알록달록한 색깔과 반지르르한 모습으로 우리의 눈을 유혹하는 파프리카. 가격도 비싸 그 씨를 받아 심으면 부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게도 하지만 그런 생각은 그 정체를 알고 나면 접게 마련이다. 심어봐야 같은 열매를 얻을 수 없는 씨앗. 아인슈타인과 메릴린 먼로가 결혼해 아인슈타인의 두뇌와 먼로의 미모를 가진 아이를 낳을 확률이 극히 적은 것처럼 우수한 형질이 자손에게 전해지지 않고 그 세대에서 끝이 나고 마는 F1 하이브리드 씨앗이다.
F1 씨앗은 좋은 형질을 가진 식물들을 자가수분해 8대째 선별하여 순수 혈통으로 만든 후 그러한 것들끼리 교배시켜 만든 것이다. 이렇게 키운 씨앗은 당대에만 우수 형질이 나타나기에 이듬해 같은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매년 F1 씨앗을 만든 이에게 로열티를 지급하고 그것을 새로 사야 한다. 씨 한 개 값이 수백원이라고 한다. 파프리카가 비싼 이유다. 씨앗의 주권이 그것을 심고 가꾸고 거두는 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조작하고 독점하는 거대 기업에 있다.
언제부턴가 보기만 좋지 껍질이 두껍고 싱거운 서양 토마토가 마트의 진열대를 채우고 있다. 예전에 얼음을 넣어 화채로 만들어 먹던 부드럽고 향긋한 토마토는 어디에 있을까. 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라고 시인이 노래한 청포도는 또 어디로 갔을까. 먼 데 하늘 알알이 박혀 주저리주저리 열린 마을의 전설은 시로만 남아서는 안 될 일인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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