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유홍준의 시와 함께] 벙어리 햇볕들이 지나가고

◇벙어리 햇볕들이 지나가고◇ 전동균(1962~ )

아프니까 내가 남 같다

도로를 무단 횡단하는 취객 같다

숨소리에 휘발유 냄새가 나는 이 봄날

프록시마b 행성의 친구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이들도 혼밥을 하고

휴일엔 개그콘서트나 보며 마음 달래고 있을까

돌에겐 돌의 무늬가 있고

숨어서 우는 새가 아름답다고 배웠으나

그건 모두 거짓말

두어차례 비가 오면 여름이 오겠지

자전거들은 휘파람을 불며 강변을 달리고

밤하늘 구름들의 눈빛도 반짝이겠지

그러나 삶은 환해지지 않을 거야

여전히 나는 꿈속에서 비누를 빨아 먹을 거야

나무는 그냥 서 있는 게 아니고

물고기도 그냥 헤엄치는 게 아니라지만

내가 지구에 사람으로 온 건 하찮은 우연, 불의의 사고였어 그걸 나는 몰랐어

으으, 으 으으

입 벌린 벙어리 햇볕들이 지나가고

취생몽사의 꽃들이 마당을 습격한다

미안하다 나여, 너는 짝퉁이다

▶해설: 별일 없이 잘 지내는가. 동갑내기 친구여. '아프니까 내가 남 같다'는 너의 말을 곱씹는다. 아프니까 나는 진짜로 내가 나 같다. 네가 '지구에 사람으로 온 건 우연'이 아니라 필연. 너도 알고 있고 나도 알고 있다. '안 태어나도 될 걸 태어난 사람'이라고 나도 나를 자책하였다만 태어난 이상 우리는 열심히 사람을 살고 세상을 살아야 한다.

혼밥을 하고 홀로 개그콘서트를 보지만 여전히 세상은 살 만한 것. 우리가 사는 곳은 '프록시마b 행성'이 아니다. '미안하다 나여, 너는 짝퉁'이라는 너의 자조와 술회는 틀렸다. 이 깊은 연민의 언술은, 네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언제 성당에 가거든 내 묵주 하나를 좀 사다오.

시인 유홍준: 1998년 『시와반시』로 등단. 시집 『喪家에 모인 구두들』 『나는, 웃는다』 『저녁의 슬하』 『북천-까마귀』 『너의 이름을 모른다는 건 축복』이 있다. 시작문학상 이형기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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