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壬午)생, 78 세, 현대의 나이 계산법으로 치면 아직도 기대수명인 84세에는 한참 멀었다. 교단에서 퇴역한 지 18년째이니 교단의 어르신으로 받을 만 한데 현실은 구세대로 밀려나 있어 아쉽다. 나와 같은 또래의 세대는 태어나면서부터 6.25 전쟁 4.19 의거 5.16 군사혁명의 사회적 격동의 변화를 몸으로 겪으면서 살아온 사람들이다.
지난날의 추억- 남기고 싶다.
60년대 교단에 첫 교사 발령을 받은 당시의 학교 모습은 글자 그대로 "콩나물교실"이나 다름없었다. 그렇지만 "콩나물교실" 이라는 용어로 교실을 비하하지는 않았다. 훗날 경제성장이 이루어지고 국민소득이 늘어가자 선진국의 20~30명에 비해 학급당 인원수가 많다는 것을 "콩나물"에 빗대어 콩나물교실이라는 용어를 고안해서 사용한 결과 국민들의 관심을 모으는데 성공했다. 콩나물 교실에서 교사들이 제대로 교육 하였을까? 아이들은 어떻게 공부 하였을까 ? 궁금하지만 더듬어 보기 민망하여 기억조차 하기 싫다. 그렇지만 기억하기 싫다고 과거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하룻길을 가도 소도 보고 중도 본다."는 말이 있다. 살다보면 좋은 일, 슬픈 일, 힘든 일도 있어서 그것을 놓치고 싶지 않고 붙잡고 싶은 추억이 누구에게나 있다. "오늘의 사회현상은 어제의 역사가 되고 어제의 역사는 오늘의 사회현상을 반영해 준다." 는 말처럼 쓰라린 과거가 있기에 오늘의 영광스런 현대화된 학교와 교실에서 배우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국민들 아니 교단의 후배들에게 꽁꽁 묶어둔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도시락의 변천은 국민생활 수준을 대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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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도시락을 싸온 아이들은 드물었다. 요즘 용어로 말하면 대부분 결식아동 이었다. 면소재지에 초등학교가 하나밖에 없어서 십리 정도나 되는 먼 곳에서 사는 아이들은 아침도 거르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아침을 먹지 않고 오기 때문에 아침 겸 점심으로 고구마나 감자를 가져오기도 한다. 나와 같이 앉은 친구가 찐 고구마를 가져왔다. 이를 안 다른 친구들이 몰래 다 훔쳐 먹었다. 그는 형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알렸다. 그의 형이 와서 몰래먹은 아이를 두들겨 팼다. 맞은 아이도 그의 형에게 말해서 그 아이를 때렸다. 형들의 싸움이 그들이 사는 동네 싸움이 되고 결국은 부모들까지 싸움에 말려들었다.
이런 싸움이 가끔 일어나기에 학교에서도 골치를 앓았다. 겨우 대책을 세운 것이 마을 별로 복도를 지정하여 점심을 먹게 하는 방안을 내놓았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도시락을 싸온 아이들이 예상처럼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60년이 흐른 초등학교 동창생들의 모임에서 도시락싸움 얘기가 나왔지만 화제의 대상이 껄끄러운지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결식은 아름다운 추억거리가 아니다. 고통일 뿐이다.
나는 남의 것 이라도 훔쳐 먹는 배짱이 없어 15분 정도 걸리는 집으로 가서 점심을 먹고 온다. 점심밥은 쌀 한 톨을 찾아볼 수 없는 꽁보리밥에 쑥이 1/3쯤 섞었다. 어머니는 어떻든 하루하루의 끼니를 잇기 위해서는 밥의 양을 늘려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온갖 대용식- 고구마, 감자, 말린 쑥, 토란 대-을 개발해서 한 끼의 식량을 절약할 수만 있다면 다 했다. 요즘 밥으로 치면 웰빙식, 건강식이라고 해서 인기가 있겠지만 당시는 식량이 부족해서 나온 대용식일 뿐이다.
어머니는 밭에 나가 일하다가도 점심시간에 맞춰 돌아오셔서 따뜻한 밥을 차려놓고 기다리셨다. 찬 보리밥은 돌을 씹는 것처럼 딱딱하다. 그래서 물에 말아먹어야 한다. 찬 보리밥은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마른 장작개비처럼 마르다. 이를 어머니는 아셨기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보리밥을 차려주셨다. 지금은 보리밥을 구경할 수 없다. 그렇지만 따뜻한 쌀밥을 먹을 때면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짜릿하다. 밥은 바로 어머니의 땀방울이었기 때문이다. 그 땀방울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농민은 우리 국민의 품성이다.
1961년 3월 31일 사범학교를 졸업했다. 교사 발령은 받지를 못해 조금이라도 어려운 가정생활에 보탬이 될까 싶어 농촌지역을 다니면서 생활용품을 팔기로 하였다. 그땐 행상을 하며 고등학교를 다닌 고학생들도 많았다. 나도 가계에 보탬이 되고자 행상차림으로 나섰다. 지금은 농촌일지라도 군소재지에 농협마트나 편의점이 있고, 전통적인 오일장이 있어서 생필품을 조달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당시의 농촌은 교통편이 발달하지 않아서 주로 수 십리 길을 걸어 다녀야 했다. 농촌생활은 단순하기 때문에 이에 필요한 생활용품도 간단했다. 예를 들면 소금을 갈아 이빨을 닦았기에 치약이나 칫솔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니까 농촌에는 치약이나 칫솔은 인기가 없다.
다만 농민들이 유일하게 관심을 갖고 사고 싶어 하는 게 비누 정도였다. 손을 씻을 때 향내 나는 비누에 관심이 높았다. 또한 농촌에서는 채소밭에 거름으로 인분을 뿌렸다. 비료가 없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반찬이 없으니까 끼니마다 밭에 나가 배추나 무를 솎아서 반찬으로 만들어 먹었다. 그런 이유로 농촌에 사는 사람들이나 채소를 사먹는 사람들은 회충으로 인해 횟배를 앓은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을 위한 구충제가 필요했다.
농촌아이들은 양말대신 버선을 신고, 신발은 검정 고무신을 신었다. 맨발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니면 발뒤축이 상처를 입기 때문에 양발을 선호했지만 당시의 양말은 비싸서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얼마 후 나일론 양발이 나와서 값이 싸지니까 수요가 많았다. 농촌에는 가게가 없었다. 특히 문구점이 없어서 학용품이 필요하지만 구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문구는 잘 팔리지만 무겁고 이윤도 많지 않다.
농촌에는 버스나 다른 화물용 자동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다. 모두 등짐을 지고 다녔다. 여러 가지 형태의 행상이 마을을 이리저리 찾아다녔다. 농촌에는 식당도 없었다. 그렇지만 어느 농가라도 들르면 바로 그 자리에서 밥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농촌에는 여관이나 모텔도 없다. 하루해가 늦어 잠을 자려면 그 마을의 기와집을 찾아가면 행랑채에서 잘 수 있다. 행랑채는 나그네들이 와서 잠을 잘 수 있도록 여유 있는 방이 마련되어 있다.
당시의 농촌은 가난하지만 인심은 후했다. 우리 국민들의 순수함이 살아 있어 사람 사는 맛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흉년에도 농촌에서는 굶어죽는 사람이 없었다. 그만큼 농촌마을은 나눔의 고장이고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나의 이런 농촌경험은 훗날 나의 교직생활에 농촌아동을 지도하는데 지침이 되었음은 물론,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체득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도농교류로 도시에서만 살다 농촌학교에 전근한 교사의 말은 이렇다 "왜 지각 했어.?" "어째서 과제를 하지 않았어.?" 하고 결과만 가지고 아이에게 책임을 묻는다. 농촌을 이해하는 교사는 지각할 수밖에 없는 원인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유를 묻지 않는다. 아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다르다. 당시의 도농 교류는 실패한 것이다.
허버드 대학교에서 삶의 방식 가운데 가장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관계" 라고 했다. 인간생활 자체가 관계가 아닌가 ? 농촌생활은 바로 이웃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용광로와 같다. 농촌생활을 이해하는 것이 농촌아이를 지도하는 첩경이다.
70 대 1의 의미
61년 3월 31일 졸업하고 농촌으로 두 달 동안 돌아다니면서 행상 아닌 행상을 하면서 지내는 가운데 5.16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3.15 부정선거 이후 밤 낮 없이 데모가 일어나고 사회기강은 혼란스러웠다. 전쟁을 거친 후라 소위 돈이나 권력으로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기피하려는 사회풍조가 만연했다. 군 입대를 합법적으로 기피하는 방법이 공무원이나 교원이 되는 것이었다.
5.16 군사정부는 새로운 국민의식을 고취하고자 사회 각 분야에 걸쳐 숨은 병역 미필자를 색출하여 군에 입대시키는 개혁을 단행하였다. 합법적이라고 하지만 법의 허점을 노려 기피한 교원들이기에 다수의 교원들이 징집되었다. 그 결과 교원 부족사태를 맞았다. 나의 교사 임용은 이렇게 뜻하지 않게 이루어 졌다.
첫 발령은 1962년 7월1일 전남 00군 00 국민 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이 학교는 6년 전 졸업한 모교였다. 24학급에 학급당 평균 학생 수는 60~70명 수준이었고, 전체 학생 수는 1600 여명에 가까웠다. 군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군소재지 학교이었다. 초임교사는 지도하기가 가장 수월한 3~4 학년에 배치하는데 나는 3학년 4반을 담임 하였다. 교실에 들어서자 깜짝 놀랐다. 아이들이 너무 많아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다. 교감 선생님이 간단히 나를 소개하고 나가신 후 한참동안 무슨 말부터 꺼내야할까 망설이다가 출석부에 눈이 갔다. 70번이 끝이었다.
70:1 요즘 서울의 강남에서 실시하는 주택청약 당첨률 일까? 어느 유명회사에서 채용하는 입사 경쟁률일까? 아니면 9급 국가공무원 채용 경쟁률일까? 아니다. 이 경쟁률은 모두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치열한 삶의 숫자일 뿐이다. 이러한 경쟁률이 60년대에도 초등학교 교실에서 볼 수 있었다. 다만 그 경쟁률에 차이가 있다면 지금의 숫자는 상대를 떨어뜨려 얻어지는 요행의 숫자이지만 그 당시의 경쟁률은 학급당 학생들의 숫자일 뿐이다.
학교종이 땡땡 친다.
학교 건물은 3동으로 나란히 지어졌고 운동장 쪽으로 강당이 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운동장을 중심으로 기역자 모양이었다. 학년 당 4개 학급이니까 24 개 교실이 필요하지만 3개동에 각각 7개 교실이어서 21개다. 이중 전관에 교장실과 교무실 자료실 현관을 제외하면 18개 교실만이 사용 가능했다. 오직 아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교실만이 덩그러니 지어졌다. 6개 학급이 교실 부족이었다. 근무하는 교원 수는 교장 교감을 포함하여 26명이고, 학교 고용원은 1명으로 27명이 근무했다. 단 한사람의 교사도 여유가 없어서 교무실은 교감선생님과 종을 치는 급사만이 달랑 두 명 밖에 없어 을씨년스런 장소였다.
학교 교무실에는 유일하게 괘종시계 하나가 벽에 걸려 있다. 학교의 모든 움직임은 괘종시계의 움직임에 따라 학교시간이 좌우되고 매 시간마다 시작과 끝을 정확히 알리는 급사라는 직책이 있었다. 급사는 오직 종만을 치기위해 채용한 사람이다. 급사는 국가에서 채용한 사람이 아닌 비정규직이기에 급사의 인건비는 해당학교의 교사들이 추렴하여 채용하였다.
"학교종이 땡땡 친다 어서 모여라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는 노래는 지금은 들을 수 없지만 학교 종과 급사는 학교를 움직이는 심장 역할을 하였다. 지금은 교무를 보조하는 사람, 과학실을 운영하는 사람, 도서실을 운영하는 사람, 청소를 전담하는 사람, 학교경비를 담당하는 사람, 오후 방과 후에 특별지도 하는 사람들로 차고 넘친다.
세월이 흘러 학교종이 없어지니 급사라는 직책도 없어졌다. 이는 당시의 국가재정이 얼마나 열악한 지를 알려주는 상징적인 연가이었다. 이젠 시계가 필요 없는 전자시대를 맞았다. "학교종이 땡땡 친다."는 동요도 시대 변화에 밀려 저만큼 전설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오후반 아이들은 고통이고 학부모는 애환이다.
학교 얘기를 하다 보면 생소한 용어들이 자꾸 나와서 필자도 혼란스럽다. 흔히 요즘 공장 노동자들이 하는 근무형태가 "전일제냐 2부제냐" 하고 논란거리가 되는 용어이기도 하고, 대학부설 평생교육원에서 실시하는 시간차 교육 형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아니다. 70년대는 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이 증가하여 교실 부족 사태를 가져왔다. 이들을 수용코자 부득이 오전과 오후로 나눠 등교하는 하도록 했다. 전일제는 학교에서 교실 하나를 한 학급이 전용으로 사용하는 것이고, 2부제는 교실을 두 개의 학급이 공유하는 것을 말한다.
2부제는 두 개의 학급이 하루 4시간씩 공부를 하게 되므로 오전반은 8시에 시작하여 12시경에 끝나고, 오후반은 1시에 시작하여 오후 5시에 끝나게 된다. 이를 오전반 오후반이라고도 부른다.
2부제의 문제점은 너무나 많아 일일이 그 문제점을 들춰낼 수 없다. 그 가운데 아이들의 등하교에 따른 안전문제가 가장 우려되는 대목이다. 오후 1시에 등교하는 오후반이 되면 부모는 걱정이다. 2부제를 적용하는 대상 학년이 연간 수업시수가 적은 1학년 ~ 3학년의 저학년이기 때문이다.
요즘 일학년을 입학하는 부모님의 심정을 상상해보라, 이들은 십 여리를 혼자서 걸어 학교를 보내는 부모의 마음은 두려움 그 자체다. 불안하다. 그래서 부모들은 어린 아이들을 혼자서 학교에 보내는 것보다 고학년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것이 안심이다. 일찍 형들과 함께 등교한 아이들은 어디서 마땅히 놀 수 있는 곳이 없다. 이들은 삼삼오오 운동장에 모여 오전시간을 보낸다. 점심도 굶고 하루를 보내는 셈이다. 맑은 날은 그래도 좋지만 비가 오는 날은 교실복도가 피난처가 되어 장바닥이나 다름없이 시끌벅적했다.
가까운 곳에 사는 아이들은 조금은 안심이다. 각 가정에는 시계가 없기 때문에는 해 뜨는 지점을 표시해 놓았다가 학교에 온다. 이래저래 농사를 짓는 부모들의 입장에서는 걱정이 많다. 논이나 밭에서 일하다가도 12시에 맞춰 집으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에 어린 아이들이 혼자서 점심을 먹게 차려놓아야 한다.
오전반보다 오후반이 피해를 보기 때문에 한 달에 첫째 주와 셋째 주에는 오전반은 오후반으로 바꿔주어야 공평하다. 교실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편법 운영을 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지금은 "오전반 오후반" 이라는 생소한 용어는 이미 교육 사전에서나 찾을 수 있지만 그 용어 속에는 고스란히 부모 교사 학교의 애환과 고통이 스며있다.
오전반 오후반 교체시간이 되면 교실은 오일장이나 다름없이 북적거린다. 교실 입구에는 신발장이 설치되어 있다. 오전반 아이들이 끝나고 보면 신발분실문제가 생긴다. "선생님 내 신발이 없어졌어요." " 더 찾아봐" 이리저리 찾아봐도 없다. "울먹이고 있다. 신을 사서 신은 지 며칠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찾기가 힘들다. 다 떨어진 신발과 바꿔 신고 가는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맨발로 보낼 수 없고 헌신발이라도 신고 갈 수 있게 조치를 해야 한다. 그리고 간단한 메모를 해서 학부님께 죄송하다는 인사말과 함께 보내야한다.
해결책은 요즘은 신발주머니가 왜 필요 한가 의심스럽지만 그 당시엔 필수품이나 다름없다. 개인별로 신발주머니를 소지하여 자기 신발을 가지고 교실 내로 가져온다. 신발주머니에서 나는 매캐한 냄새 때문에 교실 안은 언제나 메슥거린다. 여름철에는 창문을 열어 환기라도 시키지만 겨울철에는 그럴 수 없어 교실 안은 숨조차 쉬기가 버겁다. 여름은 찜통더위 속에서, 겨울은 얼음 창고 속이나 다름없는 교실에서 보낸 아이들이 어쩐지 자랑스럽게 생각된다.
오전반 오후반을 운영하는데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물론 아이들이다. 과제물이나 일기장 검사도 할 수 없다. 아이들은 마트에 들러 사고 싶은 것만 사고 가는 손님들이나 다름없다. 그냥 책보자기만 들고 왔다가기 때문이다. 이렇듯 아동 개개인의 어려움을 파악하고 이에 대한 적절한 지도를 할 시간을 마련할 길이 없다. 더구나 문자 미해득 아동을 위해 개인별 지도시간을 마련할 수 없어 애틋한 감정에 휩싸인다. 각 교과별 교수 학습자료 제작하거나 수집하는 일은 거의 구상 할 수도 없다. 비교육적인 환경을 이겨 낸 그 당시의 교사들을 생각해보면 신기할 따름이다.
. 25 × 3 〓 75
정규교실도 부족해서 강당교실을 임시로 3칸으로 막아 2, 3학년이 사용했다. 나는 초임교사라 3학년 4반을 담임했는데 남녀 혼합 반으로 70명쯤 된 것 같았다. 강당을 막은 교실은 일반 교실에 비해 면적이 좁다. 좁은 교실에 책걸상 35개 들어놓으면 교실 안이 너무 비좁기 때문에 강당교실에는 학급당 25개만 배정해 주었다. 이유는 25×3 〓 75 라는 수학공식에 대입하였기 때문이다. 즉 2인용 의자에 3인씩 앉히면 학급전체 아이들이 앉힐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공식은 전형적인 "탁상행정"의 표본이라고 본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고 나 태주 시인이 읊었다. 시구처럼 교육현장의 문제는 자세히 보아야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있다. 70명의 아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몸집이 작은 아이들과 몸집이 큰 아이들도 있고 얌전한 아이도 그리고 장난꾸러기도 있다. 2인용 의자에 3인씩 앉히게 되면 몸집이 큰 아이들은 겨우 엉덩이만 걸치는 꼴이 된다. 아이들의 신체적 특성을 무시하고 3인씩 배정하는 것은 탁상행정의 결과이다.
다른 행정행위도 그렇지만 문교행정은 탁상에서 수학공식에 대입하게 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들이 보게 된다. 문교행정은 학생 전체를 위한 행정행위지만 학생 개개인의 행복도 고려해야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학교 구성원 전체를 바라보고 행정을 하게 되면 부적응 학생을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마찬가지다. 교실안의 70명을 전체로 보고 "나를 따르라 "식의 지도는 학습 부진아나 문제아를 만들고 마는 것이다.. 70명을 개인별로 볼 수 있어야 참교육자가 될 수 있다. 그러기에 "교사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나 할 수 는 없다" 는 말은 진실이다.
3학년 쯤 되면 장난이 아주 심할 때다. "미운 7살이라고 하지 않던가?" 교사에게 주목을 하라고 해도 그때뿐이다. 뒤로 돌아 칠판에 글씨를 쓰는데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가 교실바닥에 떨어졌다. 의자에 앉은 아이들은 웃고 있고 떨어진 아이는 울상을 짓고 있다.
" 교실바닥에 왜 떨어져? "
' 나를 밀 쳤어요"
" 너는 왜 밀어?
" 안 밀어도 조금만 움직이면 떨어져요"
자기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투다. 이제까지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고 그냥 흘러 보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떨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몸집이 큰 아이들이 셋이 앉게 되면 둘이는 의자 끝에 엉덩이만 걸치고 앉아 있다. 가운데 아이가 조금 움직이면 양쪽 가에 앉은 아이들은 밀려나기 마련이다. 장난꾸러기 아이가 엉덩이를 좌 쪽으로, 그리고 우 쪽으로 움직이면 나가떨어진다. 엉덩이로 서로 밀치고 장난하느라고 교사에게 집중하지 않아 항상 소란스러웠던 것이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달리 보인다." 고 한다. "몸집이 큰 아이들은 두 명씩 앉게 하고 키가 작은 아이들은 세 명씩 앉게 하면 좋지 않을까?" 언 듯 머리에 떠오른다. 그 생각을 시연해보기 위해 실제로 키가 작은 아이들을 세워놓고 의자에 앉혀 보았다. 다행히 2인용이라도 3인씩 앉히면 무리 없는 아이들이 18명은 가능했다. 나머지 책상 19개는 몸집이 큰 아이들을 뽑아 2명씩 앉히고 남은 중간 아이들은 교실 전면인 바닥에 앉혔다.
작은아이들은 충분히 셋이서 앉을 수 있었고, 몸집이 큰 아이들은 널찍해서 만족했다. 모두가 만족했다. 좌석도 고정한게 아니고 교실바닥에 앉고 싶은 아이들과 수시로 바꾸게도 했다. 아이들은 지루하면 교실바닥으로 옮기고 책상으로도 바꿨다. 오히려 교실바닥에 앉는 아이들이 많아 책상을 비워두기도 했다.
지금 되돌아보니 오늘날 교실 풍경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아이들의 인권 문제로, 교사들의 교육권 문제로 아마 사회적인 문제가 될 터인데 그 당시 학부형들은 그러하지 않았다. 당연히 교사의 필요에 의한 것이라고 인정하였다. 교사의 권위를 존중 한다거나 교권을 보호한다는 거나 그런 거창한 구호보다는 그냥 스승을 무조건 존경하는 풍토는 절대적이었다. 가르치는 환경은 빈약하고 열악했으나 지도 교사로서의 권위나 명성은 그대로 존중해주는 사회적분위기 때문에 오히려 마음이 편했고 두려움은 없었다.
병아리교사의 아이디어가 채택되다.
교감선생님이 가끔 교실을 순방한다. 오전반 아이들이 일찍 와서 교실주위에 서성거린다든지, 지각해서 교실에 들어가지 않는 아이들이 있는지를 살피러 교내를 순회한다. 돌아다니다보면 강당교실을 사용하는 학급이 "소란스럽다" 는 것을 알고 계셨다. 유난히 우리 반이 조용해서 교실 순시 차 오신 교감선생님이 슬쩍 들여다보고 교실바닥에 앉아있는 아이들에 관해 이유를 물어 본다.
"책상에 앉히지 않는 이유는?"
" 덩치가 큰 아이들 셋이 앉으면 장난이 심해 도저히 수업 진행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실 뒤편에 앉은 몸집이 큰 아이들이 셋이 앉으면 한 아이는 엉덩이만 걸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신체적 특성을 무시하고 똑같이 평등하게 앉히는 것은 학습지도의 효과를 경감시키게 된다는 것을 교감선생님은 깨닫게 되었다. 또한 아이들은 교사의 말에 주의를 집중하는 게 아니라 서로 밀고 당기면서 자리싸움에 연연 하게 되니 교실은 항상 시끄럽고 소란스럽다는 것도 이해하게 되었다. 교육이론에 해박한 교감선생님의 소신은 교육 문제의 답은 항상 교육 현장에서 찾아야한다고 늘 강조하셨다.
교감선생님은 한참동안 내 말에 귀를 기울이시더니 고개를 끄덕이었다. 교감선생님도 교실의 소란문제에 나름대로 문제의식을 가지고 계셨다, 우리 반 교실이 다른 반에 비해 조용하고 차분하게 수업진행을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그 이유를 물었던 것이다. 듣고 보니 타당한 것 같아 자기 나름대로 결론을 맺었다.
전 직원회의에서 강당교실을 사용하는 3학년 이하는 키가 작은 아이들은 3인씩 앉게 하고 키 큰 아이들은 2명씩 앉게 하며 나머지 아이들은 교실전면 바닥에 앉으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 이후로 교실의 소란행위가 많이 줄어들었음은 물론이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아이들을 교실바닥에 앉혔다고 꾸중들을 것인데 오히려 모범사례가 되었으니...
3학년인데도 읽을 줄 몰라
60년대는 만 6세가 되는 4월 1일에 입학식을 거행한다. 그런데 농촌에서 사는 아이들 가운데 같은 또래 아이가 학교에 다니게 되면 그때서야 학기 중에도 찾아와 입학시키려는 학부모들이 있다. 농사일을 도우는 게 우선이었다가 같은 또래가 학교에 다니면 아무 때나 와서 입학을 시켜달라고 우긴다.
1학년 2학기 9월이 넘었는데 할아버지 한분이 아이 손을 잡고 무조건 교장실로 들어선다. 오래 동안 고장에서 사신분이라 교장선생님과 안면이 있는 것 같다.
"교장선생, 우리 아이 입학시켜 주소"
"지금이 어느 때라고 입학시켜줘요"
교장은 어이가 없다.
"지 또래가 학교 다니는데 저 혼자 놀면 심심해서...."
교장은 교감을 불러서 교육청에 물어보란다.
교육청에서도 뚜렷한 답변을 하지 않고 의무교육이니 학교에서 알아서 하란다는 것이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라면 의무교육이니 학기 안에만 입학원서를 내면 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6개월이 지난 아이가 1학년에 입학했다. 이렇게 학기 중간에 입학한 아들 때문에 재적 학생수가 20명이 불어 70명이 되었다. 늦게 입학한 아이들은 까막눈이다. 이들은 문자 미 해득 아이로 남는다.
농촌이라 누가 따로 가르칠 아이도 없다. 농사를 짓는 학부모들이 아이들 교육은 학교에서 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2학년에 올라와서도 그들을 위한 별도의 개인지도 할 시간과 장소가 마련되지 않아 방관하기 마련이다. 애만 태운다. 3학년에 올라와서도 여전히 까막눈이다. 문맹자를 없애려고 만든 학교에서 오히려 문맹자를 만들고 있는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늦게 입학을 시킨 학부모의 일차적인 책임이지만 학교는 이들을 없애기 위해 조금도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까막눈이의 아이들은 제도, 교사 등 복합적인 문제가 만들어낸 결과다. 이는 허약한 국가재정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누구 탓으로 돌릴 수 없다. 결국 졸업할 때까지 방관한 까막눈들이 군대에 가서야 눈을 뜨게 된다. 한글 해득반이 설치되어 성인 문맹자를 교육시킨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의 교실부족이 낳은 희생자였다.
국어시간에 국어책을 읽도록 했다. 지명을 했는데도 눈만 말똥말똥 거리고 반응도 없다. 옆에 앉은 아이가 "글자를 몰라요" 하고 대신 말해준다.. 알고 보니 20 여명에 이른다. 학교에서도 문자를 미 해득하는 아이들이 많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다음 학급 배치할 적에 별도로 "문자 미 해득아" 명단을 따로 작성하여 인계인수 한다.
이들은 과제를 해 오는 법이 없다. 글자를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문자를 모르는 아이들에게도 똑같이 과제를 내주었고, 다음날 과제 검사를 해서 해오지 않은 아이들을 상대로 벌을 주었다. 초임교사는 아이들을 개별로 보지 못하고 전체로 본다. 개별지도란 개개인의 특성을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 전체아동을 보기 때문에 문자 미 해득아 에게도 똑 같은 과제를 주는 것이다. 숙련된 교사는 70명의 아이들을 개별로 볼 줄 안다. 그게 숙련교사와 미숙련교사의 차이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문자 미 해득 아이들을 위한 특단의 지도를 해야 하는 데 그럴 시간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문자 미 해득 아이들만을 따로 가르치기 위해 교실 바닥에 앉혔다. 그들에게는 교과수업 보다는 문자해득이 최우선 과제였기 때문이다. 학습활동도 달랐다. 공부를 못한다는 아이들의 특성은 주의집중을 하지 않고 장난이 심하다. 어려움을 해결하기보다는 쉽게 넘어가려고 한다. 좀 진득한 맛이 없다. 그렇지만 재미를 느끼게 되면 오히려 그것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알아들을 수 없는 교사의 설명보다 자기들끼리의 장난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이들은 교과수업에도 참여치 않게 하고 오직 그들만의 문자공부에 전념토록 교과학습에 보완조치로 내주는 과제물도 이들에게는 적용하지 않았다. 소위 능력별 수업을 적용했다. 일반아이들은 교육과정 내용대로 진행하고 문자 미 해득아이들은 해득을 위한 문자학습만 과제로 내 주었다. 조금 나은 아이를 조장으로 임명해서 공동과제를 수행하도록 했다.
능력이 비슷한 아이들끼리라 서로 협조를 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개인별로 과제수행이 아닌 집단별로 완성 여부를 확인했다. 이들은 8개 교과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학습능력에 맞는, 오직 읽고 쓰는 것이어서 학습 부담이 적었다. 그들의 학습목표가 단출하기 때문에 학습활동도 딱딱한 교실 수업보다 교실 밖에서 자유스럽게 보내는 시간을 즐겨했다. 이들의 교실 밖 활동으로 인해 실재 수업분위기는 소란하지 않고 조용해서 학습효과도 높아졌다.
우선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말 그대로 대입하여 익히는 카드놀이였다.
① 철수는 (학교)에 갑니다.
② 순자는 철수와 (함께) 갑니다..
③ 우리는 (철수)와 (순자)도 학교에 (갑니다.).
우리 생활주변의 말을 모아서 ( )에 놓을 말을 찾아 카드를 읽고 괄호 안에 대입하는 놀이였다. 흔히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른다." 고 하듯이 자주 말로는 친숙하게 하면서 읽고 쓰기가 연결이 안 되는 것이다. 그 예로 자기 친구 이름은 물론 시장, 장터, 강, 산, 동네이름, 학용품이름, 농사용 기구, 등 생활주변의 말은 자유스럽게 한다. 이 말들을 글자와 연결시키면 바로 문자공부가 되는 것이다.
놀이가 학습이고 학습이 놀이 속에서 이루어지면 억지로 가르칠 필요가 없다. 문자 미 해득 아이라도 말은 아주 잘한다. 말과 글자를 놀이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면 글자 공부가 된다. 말을 글자로 연결시키지 못 할 때는 교사에게 달려와 지도를 받았다. 이러한 놀이학습은 일종의 자기 주도적 학습이고, 능력별 학습이고, 개별 선택 학습체제이다. 특별한 아이들을 제외하고 공부가 재미있다는 아이들은 없다. 그러나 알게 되면 흥미를 갖게 되고, 그 흥미를 느끼면 관심을 갖게 되어 비로소 공부에 열중하게 된다.
교육심리학에 "낙인효과" 라는 용어가 있다. "공부를 못 한다" 고 이미 낙인을 받은 아이들은 모든 것을 "나 못해요" 하고 입에 달고 있다. 이들에게는 할 수 있는 쉬운 과제를 내 주면 "나도 할 수 있어요" 라고 말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게 된다. 그러면 소극적인 태도에서 적극적인 태도가 형성된다. 그때부터 "자성예언"의 효과가 나타난다. 긍정적인 자성예언은 성공의 뿌리다.
춤추는 아이들이 문맹에서 벗어났다.
12월 2학기가 끝날 무렵 1학년 국어교재를 한두 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읽게 되었다. 문자 미 해득아 에게는 오직 문자 해득만을 위한 학습방법을 적용한 결과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 같다. 요즘 말로 하면 능력별 학습방법이다. 동일한 학습지도로서는 부진된 아이들을 구제할 수 없다. 이는 교단에 선 교사들은 누구라도 아는 기본적인 상식이다. 그러나 좀처럼 3학년인데도 글자를 읽지 못하는 아이들을 보면서도 구제를 못하는 것은 차별화된 교수활동에 많은 시간적인 부담을 느끼기 때문이다. 꾸중하고 질책하는 것은 최하의 지도법이다.
그런데도 학습지도 과정에서 잘하는 아이들은 칭찬을, 못하는 아이들은 꾸중을 하는 것은 웬일일까? 이유는 교사들의 자기 만족에서 찾을 수 있다. 교사들은 자기의 가르침에서 곧 효과를 찾으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성과를 얻으려고 한다. "알았어" 하고 질문하면 아이들은 "예" 하고 대답을 한다. 과제물도 똑같이 내준다. 능력이 다른데도 불고하고... 이렇게 성급한 성과, 동일한 지도가 낳은 학습부진아는 모두 안일한 교사들이 만들어 낸 작품이다.
과제를 해결한 아이들을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기에 그들의 사기는 올라갔다. 내 품에 안긴 아이들은 마치 가뭄에 시들어진 밭에 소낙비가 지나간 뒤처럼 싱싱한 얼굴로 생기가 돋았다. 개선장군처럼 의기앙양하다 지금까지 공부 못한다고 꾸중만 듣던 아이들이 칭찬을 듣는 순간 배움의 눈동자는 더 크게 떠졌다. 아이들은 쑥쑥 자랐다.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다.
6개월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1학년 교재를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 무슨 특별한 지도법도 아니다. 다만 그들의 흥미에 맞도록 과제를 해주고 서로 협동하는 방법을 고안해서 던져준 것뿐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빨리 글을 깨우칠 수 있다니... 나 스스로 놀랬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는 말이 책의 제목으로 2000년대에 발간되었다. 이들은 40년 전에 이미 고래처럼 춤추고 문자를 배우고 익혔다.
아이들은 콩나물처럼 자란다. 물을 주면 자라고 물을 주지 않으면 마른다. 아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있으면 성장하고, 없으면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란다. 그게 자연의 이치다. 어느 직업이나 같다. 콩나물 교실에서라도 교사의 사랑과 정성을 기울여 지도한다면 콩나물은 시들지 않고 자랄 것이다.
요즘 교사들은 참교육의 저해요인을 자꾸 외부 환경에서 찾으려한다. 30여명의 아이들도 많다고 아우성치고, 교사의 잡무가 많다고 외친다. 교육문제를 부적절한 조건과 환경을 탓한다. 그러나 참교육은 외침이 아니라 자신의 교육애를 되돌아보는데서 출발한다. 참교육은 완성된 조건과 환경 속에서 이루지는 것이 아니라 불리한 조건과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내가 참교사인가?"를 되돌아보는 보며 교사로서 부족한 교육애를 탓해야 할 것이다.
코미디 같은 신체검사
60년대의 아이들의 놀이는 다양하지 않아 주로 요즘말로 전통놀이였다. 그만큼 아이들의 여가선용이나 놀이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이들의 복지라는 개념조차 없었기에 어쩌면 당연하다고 본다. 바로 농사일을 도와야한다는 게 주된 관심이었기 때문이었다. 놀이는 주로 땅따먹기, 술래잡기, 콩 주워먹기 , 구슬치기 같은 것이었다. 흙 놀이를 하면 손이 더러워진다. 자연히 더러워진 손을 어디 씻을 곳이 마땅한 데가 없어 옷에다 손으로 쓱 문지른다. 새 옷도 며칠 지나면 더러워진다. 씻지 않은 손으로 먹을 것을 집어 먹는다. 비위생적인 놀이가 생활습관이 되었다.
손 등은 시커멓다. 때가 끼면 살갗이 튼다. 피가 흐른 경우도 생긴다. 손이 이러한데 발은 더 시커멓다. 개인생활이 이러한데 학교에서 지도하는데도 한계가 있다. 그렇지만 학교에서는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다. 지도 해야만 한다.
매 주 수요일이면 학교 보건주회를 갖는다. 검사항목을 사전에 예고하므로 학급에서 사전 지도하고 전체 조회에서 이를 다시 확인하는 절차를 갖는다. 신체검사는 복장 검사와 몸 검사로 나뉘다. 복장 검사의 중점은 "단정하고 깨끗하게" 라는 목표를 설정하고 하위영역으로 5개 항목을 설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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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이름표를 붙였나?
② 옷이 헤어져 너덜너덜 하지 않나?
③ 옷에 흙이 묻었나?
④ 옷에서 땀 냄새가 나지 않는 가?
⑤ 단추가 제대로 달렸나?.
당시의 아이들은 목욕탕이 없으므로 좀처럼 몸을 씻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손, 발, 목 에는 때가 꺼멓게 끼었다. 머리는 빗질을 하지 않고 물로도 감지 않는다. 콧물이 흘러도 그대로 놔둔다. 좀처럼 깨끗한 몸을 관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요즘 텔레비전에 나오는 아프리카의 아이들을 상상하면 된다. 위생적인 생활보다 더 시급한 게 자기 몸 관리하는 습관을 갖게 하도록 지도하는 것이 보건교육의 목표였다. 몸 검사의 중점도 "깨끗하고 아름답게"였다 . 그러기 위해서 하위영역으로 5개 항목을 잡았다.
⑥ 손이 깨끗한가?
⑦ 발이 깨끗한가?
⑧ 머리는 감고 빗질을 하였는가?
⑨ 목욕을 하였는가?
⑩ 몸에서 냄새가 나지 않는가?
이런 검사항목을 보면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이러한 검사항목을 가지고 조사한다면 너털웃음거리의 소재가 될 게 틀림없다. 당시의 국민생활이 얼마나 비참하고 빈곤 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지표다. 반대로 지금의 아이들은 그만큼 가정환경이나 개인위생이 선진국에 도달되었음을 말하는 증거다. 그렇지만 1960년대의 국민소득은 아프리카 생활수준의 아이들이나 다름없다. 현재의 잣대로 그 당시의 아이들을 판단해서는 답을 찾을 수 없다. 아이들 수준은 바로 국민소득의 바로미터이기 때문이다.
깨끗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나는 학급편성이 끝나고 아동 가정생활과 습관을 조사한 후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조사했다. 아무리 아이들이 하고 싶어도 단정한 옷차림을 갖추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한 달 동안은 단정한 아이들만 골라서 앞에 세워두고 좋은 점을 칭찬하였다. 칭찬을 받은 아이들에게 빨간 리본을 가슴에 달아주어 스스로 자기 몸을 관리할 수 있도록 했다.
빨간 리본을 두개 찬 아이들의 숫자가 늘어갈수록 아무리 지도해도 가정에서 뒷받침할 수 없는 빈곤한 아이들과 자연스레 구별이 되었다. 그 아이들을 위해 읍내에 사는 형제간이 많은 집에서 헌옷을 수집했다. 거의 1/3 아동이 입을 수 있는 여분의 옷이 수집되었다, 세탁하고 헤어진 곳은 바느질로 수선하고, 이름표와 함께 손수건도 달아 놓았다. 아이들이 콧물을 흘리거나 손을 닦을 때도 사용하도록 했다. 그리고 교실 뒤 칸에 정열 해 놓았다. 비 오는 날에도 입고, 보건주회 때도 입고 참석시킬 심산이었다.
농번기가 끝나고 첫 번째 보건주회이다. 물론 이미 준비한 옷을 입혔다.. 몸 검사와 신체검사 결과를 실시했다. 우리 반을 검사한 교사가 한 사람도 지적 받은 아이들이 없다고 보고했다. 교감선생님도 우리 반의 아이들을 일일이 살펴보고 단정한 몸차림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처음으로 전제 직원 앞에서 새내기 교사가 발표 할 영광을 갖게 되었다. 그 후 장학 지도시에는 반드시 우리 반을 찾았다. 용의 단정한 학급이라고 해서.
"문제아" 라고 부르는 아이들의 문제는 바로 보호자의 문제다 보호자의 역할이 필요한 아이들을 방치함으로써 나타난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제아" 라고 흔히 부르게 되면 지도가 불가능한 쪽으로 인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소위 관심의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것이다. 문제아들은 오히려 관심을 가져야하는데 거꾸로 관심에서 벗어나게 되면 더 문제를 일으킨다. 그 당시의 문제들은 이렇게 사소한 옷 입기와 신체적 더러움을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았기에 일어난 것이다. 문화생활을 하는 요즘 세대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구석기시대의 유물과 같은 것이다.
화장실 청소는 싫어
공공이용시설을 이용 하는 것도 사회적 학습이다. 공중위생 시설이 더럽다고 국민 교양수준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교양이 부족하고 공중도덕이 없다고 논란을 하지만 어디까지나 시설을 이용하는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당시의 화장실은 어디나 더럽고 냄새나는 곳이었다. 대소변은 어디서나 볼 수 있기 때문에. 공공화장실을 별도로 둘 필요가 없다. 그런 생각 때문에 어디서나 볼 일을 볼 수 있다는 생각을 낳아 공공시설이용에 관해 지켜야 할 기본예절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학교 화장실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떻든 학교 화장실은 교육적 측면에서 깨끗해야하고, 이용하는 아이들도 예절을 지켜 깨끗이 이용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그렇게 지도해야 한다. 학교에서 화장실을 바르게 사용하는 습관이 바로 가정이나 사회에 파급된다. 개발도상 국가에서는 그만큼 학교의 역할이 필요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학교는 사회의 거울이다" 고 하지 않는가?
국가의 재정이 워낙 가난하기 때문에 교육부의 재정도 취약하기 짝이 없다. 학생 수에 비해 교실수가 터무니없이 부족한데 화장실을 학생 수에 비례해 지어준다는 것은 사치스러운 배려다. 전교 학생수가 1600명이 넘는데도 화장실은 전관 과 후관 건물 사이에 각각 남녀별로 한 동씩 지어져 있을 뿐이다.
남자 화장실은 앞면에 소변보는 곳은 오륙십 여명이 올라서 일렬로 서서 볼 수 있는 일자형이고, 후면에는 삼십 여개의 문짝이 있는 대변용 칸을 만들어 놓았다. 문제는 너무 많은 아이들을 수용하는 까닭에 쉬는 시간에 한꺼번에 몰려들면 소변 칸이 좁아 어린 아이들은 소변 틀에 올라가지 못하고 화장실 주변에 보기 마련이다. 하는 수 없이 시간을 조정해서 3, 4 학년은 1교시와 3교시 5, 6학년은 2교시와 4교시 로 정했다. 1, 2학년은 여자화장실 건너편에 여자용 소변보는 곳에 임시로 가리개로 쳐서 이용토록 했다.
문제는 여자용 대소변 보는 곳이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대변보는 곳은 대변이 꽈 차 오른 곳이 많아 들어가서 보지 않고 부근 언덕 빼기에서 보는 아이들도 많았다. 학교 부근에 사는 주민들은 항상 냄새 때문에 민원을 제기한다. 수차 화장실 증축에 건의를 하지만 예산이 없다는 답변만을 듣고 온다. 어찌할 수 없기 때문에 학교 고용원과 주번교사, 그리고 남교사들이 일주일동안 매달려야만 대변을 다 치울 수 있다. 그만큼 화장실 관리는 학교장에게도 두통거리의 하나이었다.
학교 화장실은 공중도덕의 훈련장
4학년 2학기 때 교직원 전출로 인해 화장실 청소업무가 나에게 맡겨졌다. 그토록 맡기 싫은 업무인데 관리담당을 누구에게 맡길 수 없어 내가 직접 담당했다. 화장실 입구 쪽이나 바닥에는 항상 소변이 고여 있기 때문에 화장실에 들어가지 않고 주변에서 볼 일을 본다.
나는 화장실입구부터 개천 쪽으로 오물이 괴어 있는 곳을 깊이 파서 흘러가도록 물길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구덩이에는 굵은 자갈을 넣고 그 위에 모래를 깔았다. 다시 모래위에 굵고 넓은 디딤돌을 듬성듬성 놓아서 그 위로 밟고 다니도록 했다. 화장실 바닥도 물이 고이지 않도록 파서 밖과 연결시켰다. 물이 고여 있지 않으니 냄새도 나지 않고 주변이 깨끗해서 화장실 밖에서 소변보는 일이 없어졌다.
화장실 주변의 잡초들도 깨끗이 뽑고 화단을 만들었다. 대변보는 화장실에서 벌레가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석유를 뿌리고 대변실 내부의 벽에는 온갖 낙서로 가득했다. 교장선생님께 건의하여 그 당시 귀한 페인트를 구입해 주도록 간청해서 학교 고용원과 몇 사람의 교사들을 동원해서 건물내외를 칠했다. 건물 밖은 울긋불긋하게 칠했고, 내부는 어두우니까 흰색으로 밝게 했다. 대변실에는 신문지를 잘라서 화장지 대용으로 사용토록 걸어놓았다. 화장실이 어둡고 냄새나는 곳이고 더러운 곳이라는 선입견을 확 바꿔놓았다.
"깨진 유리창 법칙"이 있다 깨진 유리창으로 더러운 것을 던지는 심리인데 화장실도 마찬 가지다. 화장실이 깨끗하면 인간의 심리도 깨끗하게 사용한다. 본래 화장실은 더러운 곳이 아니다. 더럽게 쓰는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이후 달라진 화장실을 자랑하러 교장선생님은 외부 손님이 올 때면 화장실부터 안내하였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니 환경의 중요성을 새삼스레 다시 깨닫는다. 사람이 깨끗한 환경을 만드는 게 아니라 깨끗한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 이와 같은 보편적인 진리를 정치가들이 알고 초등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였으면 좋겠다. 현대화된 요즘의 화장실은 당시의 주택보다 더 화려하다. 그만큼 높은 국민소득의 산물이 아닐까? 지금 우리나라의 화장실은 만세다.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국민임을 세계만방에 외치고 싶다.
숙직은 너무나 싫어
교사의 주 업무를 교수활동이라고 한다면 그 외의 일을 잡무라 한다. 교사의 잡무가운데 교수활동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일숙직 근무다. 지금은 그 용어조차 찾을 수 없지만 학교근무가 끝난 시각 오후 6시부터 다음날 아침출근시간까지 근무하는 것을 숙직이라 하고, 아침 출근시간부터 퇴근 시 까지 근무 시간을 일직이라 부른다.
숙직은 매일하나, 일직은 휴일 하루를 근무한다. 교무는 한 달 단위로 일숙직 근무자를 기계적으로 배당한다. 부득이 근무 날짜를 바꿔야 할 때는 교사들 끼리 사전 조정한다. "어찌 젖은 날이 없으랴!" 상호조절이 안된 날은 서로 얼굴을 붉히고 소란스럽다. 그런 날은 교무가 괴롭다. 할 수 없이 그날은 교무가 고역을 대신한다.
숙직 담당하는 날은 근무시간이 6시이므로 7시에 교체되는 시간이 짧아서 대개 낮밥과 저녁밥을 함께 싸오는 경우가 많다. 아침밥은 교사가 사는 집 주변에 사는 아이들이 교사 집에 가서 가져오거나 집이 먼 교사들은 아침밥을 학교 고용원의 집에 부탁하여 아침을 해결하기도 한다. 두 명이 1조로 근무하는데 24학급이면 숫자상으로 12일 만에 돌아온다.
그렇지만 여교사들의 근무 숫자에 따라 달라진다. 당시 읍 소재지 학교라 여교사들이 발령 받아 오는 경우가 많다보니, 남교사들은 5일에 한번정도는 숙직 근무에 임한다. 남교사들의 근무 부담은 역시 숙직근무다. 규정엔 오전근무는 면제토록 하였지만 내 학급아이들을 자습 시키거나 다른 교사들에게 부담을 줄 수 없어 바로 출근하여 학습지도에 임한다. 그러니까 24시간 근무하는 셈이다. 요즘엔 일숙직 근무라는 용어를 아는 교사들이 있을까 싶다.
책걸상 관리도 너무 힘들어
학교에 교사를 지원하는 근무요원이 없기 때문에 책걸상을 수선하는 일도 교사들의 몫이다. 2인조 나무책상이고 의자라 일년 사용하게 되면 삐꺽거리는 고장난 책걸상이 수두룩하다 또한 매년 고학년과 저학년 교실이 바꿔지면 학생들의 체위에 맞도록 높이를 조정하여 학급에 배정하는 일도 한다. 고장난 책상과 의자는 못질을 하고 책상표면을 말끔하게 대패질도해서 교실에 돌려보낸다. 깨진 유리창도 보수해서 갈아 끼워야한다.
가장 힘든 일은 전학생이 오면 책걸상도 배정해야 하는데, 어느 교실에 남고 부족한지를 알아야 하고 또 이를 옮겨줘야 하는 고통도 감수해야 한다. 모든 교과의 교수 학습 자료도 손수 제작하여야 하고 학교내외의 교육환경도 깨끗이 관리해야 한다. 또 학교 내의 수목관리, 실습지관리는 물론 교내외의 청소업무와 환경정리도 교사들의 담당이다.
이렇듯 아이들을 잘 가르치는 교사보다 잡무에 능력 있는 교사들이 우대를 받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우선 교사들이 턱없이 부족한 터에 일인다역의 교사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학교장으로서도 학교경영상 그럴 수밖에 없는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가난한 국가가 가난한 학교를 만들었고 그에 따라 교사의 근무환경도 악화시키는 원인이었음은 어찌 할 수 없는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오늘날 학교의 근무환경은 너무나도 몰라보게 좋아졌다. 그만큼 국가의 경제적 부가 창출되었음을 말한다. 교사가 올바른 국가관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결수업 분반수업 합동수업-- 그런 수업도 있나?
무슨 교육 전문 교육 용어인 줄 알게다. 실제 교육학 대사전에도 없는 용어다. 1960년대에 학교에서 쓰이던 용어다. 한 사람의 교원도 여유가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는 바로 교사의 결근대책을 세우는 것이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24명의 교사가운데 개인사로 인해 공가, 병가 또는 출장이 매일 발생 한다.는 점이다. "오늘의 보결수업을 누가 담당해야 할 것인가" 를 매일 아침 결정해야 하는 교무는 난감하기 짝이 없다. 지금처럼 교사들에게 핸드폰이 있다면 사전에 조치할 수 있을 것인데, 당시엔 그런 통신기기가 없어 9시까지 출근부에 날인이 없으면 그때서야 부랴부랴 수업담당자를 지명하게 된다.
해당 학년의 담임이 결근하게 되면 우선 수업형태를 결정해야 한다. 4학년이상 고학년 같으면 한 시간씩 이웃 반 교사가 지도하게 되는데, 이를 보결수업이라 한다. 보결수업이 어려울 경우 해당학급 아이들을 나뉘어 각반에 보낸다. 이를 임시 분반수업이라 한다. 주로 고학년에서 보결수업이나 임시분반 수업이 진행되지만 두 개 학급이 동시에 비게 되면 옆 학급교사가 자습활동을 도와준다.
저학년 담임이 결근하게 되면 가장 골치를 앓는다. 저학년 아이들의 특수성 때문이다. 저학년은 자기 통제력이 없기 때문에 자기선생님만 찾는 아이들은 다른 선생님의 지시를 잘 따르려 하지 않고, 다른 학급아이들과 쉽게 어울리지도 않으려 한다. 그래서 분반 수업이 불가능하다. 오전반이 비게 되면 할 수 없이 오후반 선생님이 담당하게 된다. 그날은 녹초가 된다. 이 방법 저 방법을 동원해도 안 될 경우 전 학년을 운동장에 모여 합동수업을 하게 된다. 교과는 주로 음악이나 미술 체육을 하게 된다. 합동수업은 자기반이나 보결반이나 제대로 가르치기보다는 아이들의 안전사고나 질서유지에 주안점을 두고 가르친다.
하루 이틀 정도의 보결수업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장기병가나 출산교사일 경우 합동수업으로 끝낼 수 없다. 해당 학급아이들을 똑같이 나뉘어 각반으로 보낸다. 이를 분반수업이라 한다. 분반을 하게 되면 교실 안은 시장이나 다름없다. 싸우고 장난치는 통에 교사의 목소리는 목청을 올려도 교실 뒤쪽에 앉은 아이들은 꿈쩍을 않는다. 더구나 교과진도가 달라 지도하기가 난망하다. 그러기에 배운 내용을 다시 복습하는 정도로 마친다.
분반수업을 하게 되면 모두 다 피해를 보게 된다. 학급 담임제의 문제점이 바로 나타난다. 교과진도를 나가더라도 담임교사의 지도력이 다르고 인성이 달라 아이들이 적응하기엔 매우 곤혹스럽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분반수업을 하는 아이들은 배운 것도 없고, 가르친 것도 없다. 그러기에 학년 초만 되면 학부모들은 병가교사, 분만교사인가를 알아보고 공공연히 배척한다. 학부모가 자녀를 위한 최소한의 학습권 주장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당하다. 필자도 학부모의 정당한 권리에 동조하는 편이다. 현장에서 그것을 보고 느끼고 있으니까...
교사도 사람답게 살고 싶다.
교직사회도 인간사회인데 이렇게 분반수업, 합동수업, 보결수업이 하루도 빠짐없이 진행되고 있으니 그 당시의 교사들은 얼마나 애를 태웠을까 ? 가장 비인간적인 대우는 임신 여교사에 대한 문제다. 학교장이나 교사들이 학년 초만 되면 여교사나 분만 여교사의 전입을 찬성하지 않는다. 여교사는 숙직근무 부담 때문이고, 분만 여교사는 분반수업이라는 부담에 혐오의 대상이 된다.
언젠가 임신 여교사가 발령을 받고 왔다. 분만여교사를 앞에 두고 전화로 인사발령자와 싸왔다고 한다. 얼마나 그 여교사는 난처했는지 짐작 하고도 남는다. 분만 여교사는 법정 휴업 일을 쉬지 못하고 출근하는 교사도 있고, 임신 중에 과부담으로 인해 유산이라는 아픔도 겪은 교사들도 틈틈이 발생한다. 학부모나 교장의 눈치가 어려워 출산 후 몸이 아파 더 쉬고 싶을 때는 자기 돈으로 임시교사를 쓰는 경우도 많다.
뿐만 아니다 장기 동안 아픈 교사는 자기 돈으로 임시교사를 써야하고 학부형의 눈치를 보아야 하기 때문에 다른 학교로 전출을 희망하기도 했다. 교사는 건강해야 한다. 자기를 위해서도 하지만 아이들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건강한 교사가 잘 아이들을 잘 가르친다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학급당 아동수를 줄여 달라" "교사근무부담을 줄여 달라" 교사도 사람답게 살고 싶다" 고 주장하고 싶지만 그러하지 않고 현실적응을 해가면서 개선해 가려는 그 당시의 교사들은 양순한 양인가? 바보들의 집단인가? 의심스럽다. 그 당시의 교사들은 체제에 순응한다기보다 국가의 어려운 형편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줄 알았다고 본다. 그게 교사관이고 국가관이라고 본다.
가르치는 일보다 잡무가 더 많은 현실
교사는 가르치는 일이 주 업무 라고 하지만 실제는 잡무가 더 많다. 학교는
지역사회의 일부라고 보기 때문에 60년대 중반에는 국가적인 과제 해결을 위해 학교에 의뢰하는 하는 일이 잦았다. 국가 사회의 문제는 곧 국민의 삶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당시의 사회문제는 식량자급이 최우선 과제였다. 그런데 부족한 식량을 축내는 쥐가 국민들의 숫자보다 많다는 것이었다.
각 가정에 쥐약을 보급해주고 쥐를 잡도록 하였다. 모든 초 중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쥐약을 배정해주고, 그 증거로 쥐꼬리를 상자 곽에 10개 이상씩 수집해서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담임교사는 아침 일찍 출근하여 쥐꼬리를 세어 보고 완료여부를 확인하기도 했다. 또 어느 핸가는 가정에 파리가 들끓었다. 아이들이 파리채를 들고 다니면서 파리를 잡아 큰 병에 넣어 가져오도록 하는 촌극도 벌어졌다.
당시의 아이들은 회충에 걸린 아이들이 많았다. 밭에서 나는 채소를 그대로 반찬으로 해서 먹기 때문이다. 부유한 가정에서는 봄가을이면 구충제를 복용시키나, 농촌의 아이들은 구충제를 구입해서 복용시킬 여유가 없었다. 아침을 굶고 오라고 해서 일제히 복용시키고 다음 날에 구제된 회충을 병에 담아오도록 해서 확인하기도 했다. 또 국가적으로 쌀의 수요를 줄인다는 의도에서 혼 분식 장려를 하고자 개인별로 도시락 검사로 이어졌다.
가장 힘든 점은 한 달 동안의 검사결과를 보고해야 하는데 혼식에 협조하는 가정엔 0표, 하지 않는 가정에 x표를 해서 군청에 보고 하는 것이었다. 00의 도시락을 펴놓고 검사하는데 순 쌀밥이었다. "너 혼식을 하지 않고 또 쌀밥을 해왔구나" 하니까 "할머니가 보리밥을 싫어해요" 이럴 경우 "0표냐 X표냐" 나는 한참동안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편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잉크로 하게 되면 고칠 수 없어서 아이들이 보는 데 앞에서는 연필로 하고 보고 할 때는 잉크로 다시 고쳤다.
교사도 쉬고 싶다.
각 가정의 행복과 건강을 위해 국가의 간섭은 얼마든지 기쁜 마음으로 받아
들이고 당연히 참여해야한다. 그러나 한도가 있다. 사랑스런 제자들의 가정을 들여다보고 간섭하거나 지도 명목으로 점검하는 것은 아무리 국가적인 과제라 해도 옳은 일이 아니다. 전체주의국가에서나 할 일이다.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존중해 주어야 하니까....
가장 힘든 일이 70년대 초반인가 싶다. 비료를 많이 주어 농사를 짓게 되면 농토는 산성화가 되어 소출이 줄어든다. 비옥한 땅을 만들자는 의도로 퇴비증산 운동을 국가적으로 전개하였다. 마을은 마을대로, 학교는 학교대로 실시하였는데 실적이 우수한 학교에는 상금을 주어 학교 끼리 경쟁을 유도했다.
학교에서도 학년별 학급별 목표를 정해서 목표를 달성한 학급 아이들에게는 공책과 연필을 상금으로 준다는 것이었다. 눈물겨운 것은 꼬마 1학년이었다. 형들이나 누나들이 자기 목표를 채우는 것보다 1학년 동생들의 목표를 채우는 게 더 중요했다. 그 결과로 1학년 6개 반의 실적이 가장 높았음은 물론이다. 형과 동생의 끈끈한 우애가 돋보이는 퇴비증산 운동이었다.
여름 방학이 다가오면 교사들은 오히려 더 바쁘다. 쉬는 게 아니라 더 무거운 책무가 앞을 가리고 있다. 여름에는 풀이 무성하게 자란다. 아이들에게 과제물로 풀을 개인당 20kg 씩 베어서 가져오게 했다. 교사들은 매일 출근하여 가져오는 풀을 저울로 달아 날마다 기록한다. 목표량을 채운 아이들에게는 공책이나 연필을 준다.
또 마을 과제도 수행해야 한다. 각 마을별로 아침 6시에 일어나 체조를 하고 마을청소도 한다. 책임구역을 마을별로 담당한 교사들은 아침마다 찾아가서 참석여부를 확인하고 개인별 참석카드에 날인해 주었다. 교사들은 쉬는 게 아니라 오전에 출근하는 바람에 여름철 한시도 쉬지 못하였던 기억이 아릿하다.
산에 나무 심는 것이 가장 자랑스러워
학교가 국가사회의 요구에 동원되는 일은 사실 괴로운 일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보니 가장 자랑스러운 일은 식목일에 나무 심는 일도 추억의 한 뿌리로 기억되지만 학교를 지정하여 "민둥산을 푸르게" 라는 나무심기 운동은 가장 성공한 대 지역사회 활동의 하나라고 본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산은 거의 민둥산이 대부분이었다. 매년 겪는 홍수로 농사는 물론 재산상의 손실은 얼마나 보았는지 말로 형언할 수 없다. 국가에서는 수해, 한해를 막기 위해 여러 가지 시책을 추진하는 가운데 학교에는 담당지역의 산을 지정해서 나무심기를 시작했다.
헐벗은 산에서 흘러내리는 토사를 막기 위해 잔디를 심기도 하고 군에서 배정한 은사시나무, 포프라, 아카시아 등 속성수를 심었다. 가뭄이 들면 세수 대야로 부근의 물을 날려다가 주었다. 학교에서 만든 퇴비로 묘목에 뿌려주었고 잡초도 뽑아 주었다. 그렇게 애지중지 심어놓은 산이 이제는 사람들이 드나들 수 없을 정도로 우거지는 학교림이 되었다. 우거진 산으로 변모된 것을 보면 그것만은 잘 한 것 같아 가슴이 뿌듯하다.
1960년대의 학교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벌써 내 나이가 80줄에 들어섰다. 지금 내 나이는 돌아가신 할아버지 나이보다 더 많다. 그만큼 "오래살고 있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나는 덤으로 살고 있는 셈이다. 역사책에서 배운 시대의 변화는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가 수 천 년에 걸쳐 진화해 왔다. 그런데 수천 년에 걸쳐서 이루어진 변화를 불과 80년의 세월 속에서 다 맛보았다. 그만큼 격동의 시간을 보낸 것이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80년의 세월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보고 싶다. 한 세대에 이렇게 변화가 빠른 국가는 지구상에서 찾아볼 수 없을 것 같다.
60년대의 보릿고개는 지금은 들을 수 없는 용어가 되었지만, 초근목피로 겨우 목숨을 이어가는 우리 조상들의 슬픈 배고픔의 역사를 대변하는 용어 그 자체이었다. 70년대는 통일벼라는 다수확 품종을 개발하여 배고픔을 어느 정도 면하게 되자 혼 분식을 장려하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80년대는 쌀밥은 부자들만이 먹을 수 있다는 관념을 깨뜨려 누구라도 어느 가정에서라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90년대는 비로소 배고픔의 고통에서 벗어났다는 안정감이 국민들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2000년 대 부터는 식단을 짜는데 "건강식을 어떻게 짜느냐" 로 국민들의 관심이 바뀌어 쌀보다는 영양식을 중시하는 시대로 건너뛰었으며 2010년대에는 세계의 유명한 식품회사들의 음식 맛을 평가하는 선진 국민이 되었다.
이와 같은 시대적 변화를 몸으로 체험하고 마음으로 살폈다. 과거가 현실 같고 현실이 과거를 닮은 것 같아서 우리 세대를 가리켜 "낀 세대"라고 한단다. 지나간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다. 자꾸 즐겁고 유쾌한 일이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서럽고 불쾌하고 가슴 아픈 일만 떠오르기 때문이다. 가슴앓이다. 과거를 붙들고 가슴앓이를 하는 것은 시간만 축내는 것과 다름없다. 그렇지만 나의 초임 병아리 교사시절의 경험만은 오늘의 현대화된 학교에서 근무하는 교사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언젠가 초등학교 교사의 한 말이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우리 반의 학생수가 31명입니다. 선진국의 학생 수에 비해 많습니다." 말하면서 "학생의 학습권과 교사의 교수권을 제대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25명 정도가 되어야한다." 고 하였다. 나는 그의 말을 경청하면서 들려주고 싶을 말을 꾹 참았다. "나는 70명을 가르친 적도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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