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이 글은 한 가정의 책무를 다 하기 위해 평생 동안 지게의 밀삐 사이에 목을 넣고 살아온 한 아버지의 애환을 그린 이야기다. 우리 가족과 함께 울고 웃으며 내가 직접 보고 듣고 경험했던 사실들과 부모님과 함께 지난했던 모진 삶을 내가 기록한 것이다.
대를 잇기 위해 아버지는 고향을 버리고 터를 찾아 일가친척 하나 없는 타향에서 살았다.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타향에서 일제의 징용대상자가 되자 부산으로 가서 몰래 밤배를 탔다. 부관 연락선이 닿은 시모노세키에서 화물을 지게로 나르는 노무자가 되어 외국 생활을 했다.
해방이 되었고, 6.25 전쟁이 일어났다. 그 해 여름 경찰관이 아버지를 잡아 어딘가로 데리고 갔다. 그날 밤 아버지는 유학산 전쟁터에 투입되었다. 밤낮이 따로 없는 전장에서 하루에도 여러 번 탄약을 지게에 지고 오르내렸다. 몸이 쇠약 할대로 쇠약해져 더 이상 쓸모없는 몸이 되자 군은 아버지를 풀어 주었다. 밤늦게 집에 도착한 그날 밤 아버지와 주고받은 지게부대 실상은 내 평생 아버지와 마주했던 가장 긴 시간이었다.
2. 터
열여덟 동갑으로 아버지와 결혼하신 어머니는 일곱 아이를 낳아 차례대로 모두 홍진으로 보내고 이어 누나가 태어나자 할아버지는 작심한 듯 손주 아이 이름을 죽지 말라고 '돌이'라고 지었다. 내 사촌 중에도 '돌이'라는 이름을 가진 동생이 둘이나 있다. 할아버지는 그리해도 불안하셨는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아버지와 어머니를 부르셨다. 너희들은 여기서 살지 말고 고향을 떠나 어디든지 가서 아이나 잘 키우라고 당부하셨다.
아버지는 조부님의 말씀에 따라 누나가 태어난 이듬해 수성면 범물동에서 대구부 금정 지금의 태평로 2가로 이사했다. 그러나 막상 가서 살아보니 집과 먹을 양식은 해결되었으나 쓸 돈이 없었다. 그전에 범물동에서 살 때는 소깝이나 장작을 해서 소구루마에 싣고 남문시장에서 팔아 해결했으나 이제는 산도 멀고 소도 없는 처지에 전과 같이 하실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세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어디라도 가서 품을 팔았다. 농사일과 땔나무를 해서 지게를 지고 산길을 오르내리는 일은 일상의 일이었기에 힘으로 하시는 일은 만만했고 겁이 없었다. 그 당시에 동네 부근에서 제일 높았던 농아학교 3층 신축 공사장에서 여러 달 동안 지게질을 하며 건축자재를 운반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대구역 서쪽 도로변에 있었던 넓은 대구역 화물 하치장에서 대구역을 들어오고 나가는 화물의 상하차 일을 오래도록 하셨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무렵 대구역으로 버스를 타고 갈 때 보면 언제나 하치장 마당에는 파손된 돌가리와 횟가루가 늘 여기저기 흩어져 허연 가루 때문에 마당은 늘 희뿌였었다.
아버지는 이런 일거리가 연속적이고 장기적으로 있지 않아서 이곳에서 만족하지 못하시고 더 많은 일거리가 있는 곳으로 가서 오래도록 일을 하고 많은 돈을 벌고 싶었다. 객지에 가서 일을 하고 있을 때 징용 대상자에 이름이 올라 그 명단에서 지울 수가 없게 되자 "집에 급한 일이 생기면 우체국에 가서 일본으로 전보를 쳐라" 하고는 부산항에서 부관연락선에 몸을 실었다.
시모노세키항에 도착한 아버지는 그곳에서 부두 노동자가 되었다. 임금 수준은 높고 물동량이 많아 오래 머물 작정을 하시고 일본 주소를 어머니에게 보냈다.
아버지가 집을 떠나신 지 몇 달 후 어머니는 혼자 집에서 나를 낳고(1939년) 일본에 계시는 아버지에게 전보를 쳤다. 아버지는 아들이 보고 싶었는지 일본 생활을 급히 청산하고 가방 하나만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아버지가 들고 온 가방 안에는 작업복 몇 가지와 내 머리를 손수 깎을 일본제 바리깡, 유성기 바늘이 가득 든 주석 케이스 한 통이 있었다. 그 바리깡은 아버지가 오신 후부터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 머리를 깎은 보물이었다. 지금까지도 반짝반짝하는 이 보물을 내가 보관하고 있다.
아들자식 하나 없이 딸만 셋을 두셨던 외조부님은 자신의 원을 풀어준 맏딸이 너무 좋아 자신의 일인 양 무척 기뻐하셨다. 내가 태어나고 한 칠이 지나자 외조부님은 딸네 집으로 오셔서 외손자 이름을 직접 지어야겠다고 하셨다. 도랑만 건너도 타관인데 범물동에서 여기까지 도랑을 몇 개나 건넜는데 하시며 두 타관 세 타관도 더 되겠다고 즉석에서 내 이름을 지어주셨다. 그래서 나는 타관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아버지는 내가 아직 넘어야 할 죽음의 큰 산이 버티고 있기에 출생신고는 미루고 계시다가 내가 제구실을 무사히 치르자 태어난 지 4년 후 출생신고를 했다. 그 기간 동안 어머니는 얼마나 초조하게 하루하루를 살아오셨을까. 누나 역시 출생 신고한 그해 대구달성국민학교에 입학하여 일본식 성과 이름을 받고 공부했다. 누나는 해방이 된 그해부터 자기 본이름을 찾았지만 그 이름 때문에 늘 불평했었다. 중학교에 진학하고는 집에 와서 더 심하게 불평하더니 드디어 공부하기 싫다는 말까지 엄마에게 해댔다. 선생님들이 시간마다 바뀌어 들어오시면 그때마다 부르는 이름 때문에 반 친구들의 놀림에 괴로워했었다.
누나는 수시로 이름을 바꿔달라고 했다. 부모님은 딸을 살릴 걱정만 했었지 속마음을 몰랐고 누나는 누나대로 부모님의 마음을 몰랐다. 그 후 동생이 태어나자 이름을 일찍 짓고 출생신고도 곧바로 했다. 후일 내가 어머니에게 동생 출생신고는 왜 그렇게 빨리했는지 물어보니 한 사람 몫이라도 배급 식량을 더 많이 타려고 그랬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나온 배급식량을 나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이름만 식량이지 사람이 먹을 식량은 아니었다. 냄새만 맡아도 머리가 아프고 구역질이 나서 도저히 사람이 먹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어머니가 배급이라고 타 오신 것은 콩깻묵이었다. 콩기름을 짜고 나온 깨묵을 얼마나 습하고 더운 창고에 두었던지 시퍼런 곰팡이가 콩쪼가리마다 붙어 여기에서 뿜어내는 고약한 냄새 때문에 나는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변질된 옥수수도 같이 나왔지만 그것도 그랬다. 나는 아버지가 고향에서 가져오신 보리쌀과 보리 속 등겨로 만든 개떡으로 끼니를 때웠다.
여동생이 태어나기 전 외가에는 머슴이 징용으로 붙잡혀가고 그해 한 달 간격으로 외증조부와 외조부 두 분이 연달아 돌아가셨다. 외가에는 외증조모님과 외조모님 두 분 할머니만 남아 넓은 집을 지키고 계셨다. 농토는 일할 손이 없어서 그대로 놔두고 남자 세 분이 갑자기 없어진 외가에는 두 할머니들이 손을 놓고 탈기상태로 계셨다.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농사일을 척척 두 량할 줄 모르는 두 할머니는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
3. 집
외가 동네의 총대 어른이 보다 못해 아버지를 불렀다. 자네가 처가 농사도 지어주고 수성들에 있는 전답을 팔아 여기 와서 대토하고 살라고 했다. "자네가 낯선 금정에서 그대로 있다가는 반드시 징용 간다. 대동아전쟁 말기라서 사람이 없어서 왜놈들이 눈에 불을 켜고 난리인데 거기에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자네는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없다"고 했다. 처가로 들어오면 왜경에게 "자네가 없으면 이 집에 농사지을 사람이 없으니 사위라도 불러들여 농사를 지으면 공출도 받아낼 수 있다고 잘 이야기해서 징용에 안 가도록 빼주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처가로 들어간다는 대목에서 며칠을 망설이시다가 결국 어머니의 재촉과 자신의 목숨을 보장받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모두에게 옳다고 생각하시고 금정 집을 처분하고 처가로 들어갔다.
그 후 두 해가 지나고 해방을 맞았다. 아버지는 고향들에 두고 온 농토를 팔고 집 판 돈을 합하여 외가 곳에 대토하셨다. 어머니는 친정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안 계시는 집안에서 딸들은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그때부터 전보다 다르게 나를 더 귀하게 여겼다. 수시로 절을 찾아 아들의 명이 길도록 기도드리고 해마다 돌아오는 삼짇날 새벽에는 맑은 금호강 물가에서 정갈한 음식으로 상을 차리시고 동해바다 용왕님 서해바다 용왕님 남해바다 용왕님을 청하시고는 소지에 불을 붙여 하늘 높이 손바닥으로 연달아 받쳐 들며 아들이 일찍 죽지 말고 오래오래 살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내가 군에서 제대하고 집에 온 첫날 아침 동생이 "오빠가 군에 가고 난 뒤부터 어머니는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마다 밥 한 그릇을 따로 담아 상을 차리시고 오빠의 무사귀환을 위해 빌었다"고 했다.
내 나이 20세가 넘어가자 어느 날 내가 있는 앞에서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아들이 장가들면 논 몇 마지기라도 주면 먹고사는 것은 걱정을 안 해도 되겠제?" 하셨다. 순간 그 말을 받은 어머니는 "논 열 마지기가 골병 열 마지기다. 나는 그렇게 못하느마. 그래 키울 생각 손톱만치도 없구마. 꼴란 그거 가지고 야가 천 날 만 날 땅이나 파다가 말겠다. 골병드는 농사는 안 시킨다. 사내는 눈을 밝혀야지."하시고는 "여자로 태어나서 공부 못한 것이 한이 되더마. 내 친정아버지가 내가 여자아이라도 나를 일본에 공부하러 보냈다면 지금 나는 이렇게 안 산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사내아이를 무척 좋아하셨다. 어머니 자신도 다음 세상에는 남자로 태어나고 싶어 하셨다. 내가 장가들고 첫딸과 아들 둘을 두었을 때 일이었다. 아내가 넷째 아이를 혼자 병원에 가서 출산하고 바로 집으로 왔길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처가 해산하고 집에 와있다고 전했다. 그리고 며느리 회복 구완 좀 해달라고 청을 했다.
"뭐 낳았노?"
어머니는 사내아이인지 딸아이인지 몹시 궁금했다. 어머니에게 바른말을 하면 안 오실까 봐 이렇게 말씀드렸다.
"와 보소 보시면 알깁니다"
어머니는 전화기를 놓자마자 택시를 타고 오셨다. 집안으로 들어 오시자마자 아이의 아랫도리에 덮인 기저귀를 확 당겨보시고는 "꼴난 가시나 낳았다고 와 날 부리노? 니 사주에는 아들이 셋인데 와 딸 놓노? 힘은 똑같이 드는데."하시고 어머니는 그날 저녁 미역국 한번 끓여주시고는 바로 집으로 돌아가셨다. 훗날 처가 "어머니도 같은 여자인데 너무 하십니다"하자 "나는 나도 싫고 가시나도 싫다 나는 사나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하시면서 "남자가 없는 집은 남이 만만히 보고 기가 죽은 집이야 남들이 우리를 업신 여긴다"라고 하셨다.
그 뒤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원대동 어머니의 생가는 어머니에게는 낙원이었다. 어머니 혼자 계시는 집이 동네 할머니들에게는 마음 편한 좋은 놀이터였다. 십 원짜리 민화투를 치시다가 눈과 감각이 어두운 할머니가 두 장을 한 장이라고 생각하시고 가지고 가면 "이 할마시가 와 속이노?"하시면서 한참 시끄러웠다. 또 화투를 치시다가 앉아있기가 버거운 할머니들에게는 그때 아무 데나 눕기 편하시라고 어머니가 스티로폼으로 만든 십여 개의 베개가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어떻게 누워있어도 흉보는 이가 없어 아침만 되면 허리가 구부정하신 안노인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어머니 집으로 모여들었다. 나는 일요일이 돌아오면 치아가 성치 않는 할머니들이 잡숫기 쉽게 늘 콜라와 과자 빵이나 뻥튀기를 들고 어머니 집으로 갔었다. 그때 나를 보신 할머니들은 참 좋아하셨다.
그렇게 일상이 변함없이 여러 해가 흘러갈 쯤 어느 날 어머니 친구 한 분이 나를 부르셨다. "낮에는 자네 엄마가 우리하고 그럭저럭 잘 지내는데 눈이 문제다. 삼시 세끼 잡수시기가 걱정된다."고 하셨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내 집에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그냥 혼자 계시게 해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어머니에게는 눈을 수술해 드리겠다고 약속하고는 내 집으로 어렵게 모셔왔다.
화장실에 자주 가시는 어머니를 위해 우리 내외가 자는 방에 같이 주무시게 했다. 방안에 화장실이 있어서 어머니에게는 참 편했다. 어두운 밤에 멀리 모퉁이를 돌아 화장실을 가던 수고도 덜고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넘어지실까 염려할 일이 없었다.
그럭저럭 보름쯤 지났다. 어머니는 새벽 4시만 되면 꼭 일어나시고는 혼잣말로 "밤이 지겹다. 해는 와 빨리 안 뜨노?. 답답해서 죽겠다."
큰소리로 말씀하시고는 담배를 피우셨다. 그럴 때마다 우리 내외는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고 이불을 당겨 덮고 눈과 귀를 막았다.
내가 퇴근해서 집에 오니 아내가 또 어머니가 하신 말씀을 내게 전했다. 어머니가 자기 집으로 가시려고 하시고는 "그놈 자식 담배도 몬 푸게 하고 나는 그기 심심초인데 우얄라고 그 말하노? 바람 잘 통하고 시원한 내 집에 갈란다. 문이라 카는 문은 다 닫고 답답해서 못 살겠다. 이 집은 절간같다. 이런 집에서 내가 혼자 우째 사노 감옥소가 따로없다. 여가 감옥소지 여기에 친구가 있나 길이라도 알면 내 혼자 갈낀데."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그 무렵 어머니의 눈에 백내장이 더 심해져서 손자가 근무하는 병원에 가자고 말씀 하시길래 그리로 같이 모시고 가서 수술도 해드렸다. 우리 집으로 오신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세상이 훤하다며 빨리 내 집으로 보내달라고 이번에는 나에게 직접 말씀하셨다. 어찌해야 좋을까 그냥 우리 집에 계시다가 우리가 없는 사이 집을 나가시면 행방불명이라도 되지 않을까 또 교통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그 후 어느 일요일에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달성공원으로 갔다. 답을 찾고 싶었다. 그 시간에 사육사가 동물들에게 먹이를 던져주고 있었다. 나는 그리로 가봤다. 구루마에 실려 있는 것을 보니 보통 사람보다 더 잘 먹여주는 걸 보았다. 내장을 제거하고 털도 말끔히 뽑고 동물들의 입이 찔릴까 봐 주둥이와 발톱까지 제거하고 깨끗이 씻은 통닭과 그때 바나나 한쪽에 2~3천원 하던 때에 바나나와 사과, 수박, 배추, 얼음 그밖에 다른 과일들도 수북했다.
나는 그때 그 자리에서 생각했다. 과연 저 짐승들이 저렇게 매일 먹는 먹이를 정량씩 가만히 앉아서 얻어먹고 외부의 적도 없이 편안하게 잠이나 자고 사는 것이 행복할까 아니면 며칠씩 굶더라도 넓은 대자연 속에서 눈비를 맞더라도 자유롭게 뛰어다니다가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골라잡아 먹고 가고 싶은 곳으로 가서 잠을 자며 살아가는 것이 더 행복한 삶이 아닐까. 어머니의 말씀마따나 자기가 아는 길로 가고 싶은 곳에 가시기도 하시고 잡수고 싶은 것 잡수시고 누구의 간섭도 없이 낯익은 친구들과 같이 지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되자 다시 어머니를 빈집으로 보내드렸다. 우리 집으로 오실 때에는 느릿느릿 오시더니 빈집으로 돌아가실 때에는 걸음이 더 빨랐다. 빈집에 들어서자 내게 한 말씀하셨다. "니가 없었으면 누가 이래 해주겠노. 또 느그 집에 가자고 하지는 마래이"하시면서 무척 좋아하셨다.
4. 전쟁
월요일이었다. 그날은 학교 운동장에서 전교생이 모여 아침조회를 하는 날이었다. 웬일인지 아침종도 치기 전에 운동장에는 선생님들이 우리보다 먼저 나와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리고 있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죄지은 학생처럼 고개를 숙이고 종종걸음으로 우리 반 줄을 찾아 맨 뒤에 붙어 섰다.
잠시 후 종소리를 듣고 학생들이 모여들자 체육담당 선생님의 구령에 따라 줄을 맞추고 마주보고선 선생님과 허리 굽혀 인사했다. 바로 다음 교장선생님이 빠른 걸음으로 교단에 올라오셨다. 목이 잠기시는지 그날따라 안 하시던 잔기침을 두 번이나 하시더니 "어제 새벽 4시에 북한 괴뢰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3.8선을 넘어 이남으로 쳐들어왔다"라고 하시면서 용감한 우리 국군들이 그들을 격퇴하고 있으니 학생 제군들은 아무 걱정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말씀하셨다.
어제 일어난 전쟁을 그때까지 까맣게 몰랐던 나는 처음 듣는 전쟁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몰라서 놀라거나 무섭지도 않았다. 더구나 교장선생님의 말씀을 철석같이 믿었기에 그 말씀대로 며칠 지나면 잠잠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날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무엇 때문인지 그전같이 도중에서 놀지 않고 똑바로 왔다.
그때 우리 동네 60여 호 중 라디오가 있었던 집은 두서너 집뿐이었다.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은 일요일 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부산으로 피난 가고 없었다. 참으로 캄캄한 시절이었다. 집으로 와서 아버지에게 학교에서 들은 대로 말씀드렸더니 아 그래 하시고는 별다른 말씀도 없이 늘 하시는 대로 수금포를 어깨에 메고 멀리 떨어져 묘지가 있는 말가오지기(한마지기 반) 논으로 가셨다. 만약 지금처럼 매스미디어가 시시각각으로 세세하게 전쟁의 참상을 TV나 휴대전화 화면에 담아 보냈다면 전후방 없이 전국에서 생난리 북새통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그때 그 시절이 오히려 혼란을 크게 잠재우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전쟁이 일어나고 며칠이 지나도 동네 어른들은 늘 하시던 대로 일상생활을 하셨다. 아버지가 동네에서 새 소식을 들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우리는 학교에서 선생님들로부터 새로운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때마다 마음 한구석에 들어와 있던 걱정이 희미하게 우리 앞에 하루가 다르게 다가왔다.
전쟁의 파문이 거리에서부터 조금씩 일어나고 있었다. 평시에 보지 못한 외국 군인들이 자주 보이기 시작했고 그들을 태운 국방색 지프와 트럭들이 바쁘게 오갔다. 말씨가 다른 윗녘 사람들이 섞이더니 차츰 그들이 거리를 메우기 시작했다. 조용하던 우리 마을에도 동네 청년들에게 징집 통지서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우리 마을에도 술렁거리는 기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징집 통지서를 받은 청년들은 그들의 부모와 형제자매, 친척들과 함께 마을 밖 오래된 당산나무 밑에 가서 전장에서 무사히 귀환하기를 빌면서 절을 하고는 그 나무 주위를 돌았다. 많이 돌면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다고 많이 돌고 일선으로 가기도 했다. 그러나 암만 많이 돌아도 죽은 청년의 수가 날이 갈수록 늘어가자 전쟁에 겁이 나거나 꾀가 많거나 귀한 아들들은 통지서를 버리고 자기 집 어디에 땅을 파고 숨어 지내다가 더러는 전선에 나가지 않았다.
전쟁이 치열해지고 징집 자원이 줄어들자 경찰관은 아예 처음부터 징집 명단에서 빠졌거나 징집 통지서를 받고도 나가지 않은 집을 불시에 다시 가서는 미구 같이 찾아내어 잡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철없던 우리들은 학교에서 집으로 일찍 보내주는 게 정말 좋았다.
한참 자라나던 나이에 우리는 먹어도 먹어도 자꾸 먹고 싶었다. 집에 일찍 가도 어머니는 밭에 나가셔서 집에는 안계셨고 우리 동네에는 점방 하나도 없던 시절이라 보리밭으로 갔다. 익은 것은 제쳐두고 아직 덜 익은 파란 보리 싹에 먼저 깜부기가 된 이삭을 뽑아 파란 보리 싹에 문질러 놓으면 대략 일주일 후면 모두 깜부기가 되어 먹을 수 있다. 까맣게 깜부기가 된 이삭을 뽑아 그대로 먹기도 하고 구워 먹기도 했다. 구워 먹는 맛이 좀 나았다. 그후에도 장난삼아 여기저기 멀쩡한 보리 싹에 깜부기를 문지르기도 했다. 그렇게 변하는 게 신기했다.
그리고 금호강에 나가 빗자루로 숫잠자리를 잡아 호박꽃으로 암놈같이 보이게 분장하고는 실에 매어 날리며 숫놈들을 유혹했다. 손가락 사이에 세 마리씩이나 끼워도 모자랄 정도로 많이 잡았다. 빨리 집에 와서 구워 먹기도 하고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세상을 조금씩 익히며 살아가는 길을 스스로 배워나갔다. 나무 위로 빨리 올라 가기도 했고, 일찍이 헤엄치는 것도 배웠고, 물밑으로 잠행하여 친구들의 다리를 붙잡고 놀래 키기도 했다. 이런 것들이 훗날 내가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어 내 앞에 닥친 죽음을 여러 번 비켜나기도 했다.
그때 나는 달서국민학교 5학년이었다. 열두 살이었다. 부근에 있던 달성국민학교에는 학생들이 불어나서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어 공부했다. 그로 인해 새로 생겨난 학교가 우리 학교였다. 대구 달서국민학교다.
나는 해방 후에 들어간(1946년) 순 한글세대이다. 젊은 선생님들이 잇달아 전장으로 나가시고 담임선생님이 없어진 반은 여선생님 반으로 합쳐 공부했다. 자꾸 남자 선생님들이 전장으로 나가시자 세반을 한 반으로 만들어 공부하기도 했다. 우리는 야외로 나가 공부했다. 키 큰 학생이 흑판을 둘러매고 반장은 분필과 지우개 담당이었다. 지금도 거기에 서있는 날뫼(비산동)성당 부근이었다. 그 부근에는 그때 건물은 하나도 없었고 그저 평평한 산이었다.
수업은 늘 오전 수업만 하였다. 전쟁의 불길이 자꾸 커지자 우리 학교에는 군인들이 들어왔고 우리는 학교에서 약간 떨어진 철로가에 급조한 가교사로 이사했다. 가교사 지붕은 종이에 콜타르를 칠한 것으로 여름에는 몹시 덥고 겨울에는 추웠다. 얼마 안 가 우리 학교에 들어온 군인들의 부주의로 우리 학교는 모두 불에 타고 뼈대만 남았다. 우리는 불타는 학교를 애처롭게 보았고 여학생들과 여선생님들은 불타는 교사를 보며 울기도 했었다. 선생님들의 미련 때문이었는지 우리들의 졸업사진도 불타고 뼈대만 남은 붉은 벽돌을 배경으로 찍었다.(보관) 그 후에도 후배들은 이 학교에 영영 들어가 보지 못했고 그 자리에는 지금의 경일중학교가 차지했다.
피난민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전선이 대구 부근까지 내려오자 그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조병옥 박사는 대구는 어떤 경우에도 사수할 터이니 안심하고 피난 가지 말라고 하셨다. 우리 동네에는 갈 사람은 다 피난 갔고 우리들은 피난 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밤낮없이 내려오는 흰옷을 입은 피난민들은 안동치도로 걸어 내려와 그때 폭이 좁은 나무다리였던 팔달교를 건너 소구루마에 짐을 싣고 다니던 좁은 방천둑(지금의 신천대로)으로 밤낮없이 내려왔다. 그래도 우리는 마음이 타거나 조바심도 없었다. 도리어 엉뚱하게도 우리도 저렇게 소풍 가듯 피난 한번 가봤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피난민들은 걷다가 가족중에 힘겨운 사람이나 몸이 불편한 가족이 생겨나면 인근 마을 아무 집이나 같이 가서 봇짐을 풀었다. 우리 집에도 많을 때는 네 가족이 처마 밑으로 들어오기도 했었다. 그들은 비만 피할 곳이 있으면 어디든지 들어왔다. 피난 가다가 식량이 떨어진 가족은 동네 빈집을 찾아갔다. 먼저 피난 간 집에는 다소나마 먹을 것이 남아있었다. 쌀, 보리, 소금, 된장, 간장 같은 먹을 것을 가져다가 돌 몇 개로 쌓은 바깥 부엌에서 냄비 하나로 조석을 해결했다.
철없던 나는 그게 그렇게 좋게 보였던지 우리도 피난 가자고 어머니에게 졸랐다. 피난민들이 등에 메고 온 보따리에서 먹을 것을 꺼내는 걸 보고 옷도 바꾸어 입는 것을 보니 우리도 빨리 그렇게 하고 싶어 어머니를 자꾸 졸랐다. "에이참, 이 자식 골천번도 더 졸라쌌네."하셨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어머니는 큰장(서문시장)에 가서 광목 몇 자를 끊어 다섯 개의 걸망을 만드셨다. 그 안에는 생쌀 약간 마른 백찜떡(백설기) 두덩이, 양말 두 켤레, 여름옷 두벌, 미숫가루 한 그릇, 돈 약간, 성냥 한 통, 숟가락 한 개가 전부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굶어 죽고 얼어 죽을 짓이다.
그해 7월 말이나 8월 초 무렵이었다. 대구 주변의 전세가 위중한지 부대 이동이 잦은지 키가 큰 이태리포플러에는 미군 병사들이 까만 비닐 피복이 덮인 통신선을 어지럽게 걸고, 끊고, 잇고 했었다. 다부동까지 내려온 북한군은 해가지고 사방이 어두워지면 매일 밤 대구역을 향해 벌건 불덩이를 날렸다. 나는 그 불덩어리로 무얼 맞히려고 그리로 날려보내는지 알지 못했다. 날이 갈수록 때맞추어 날아가던 그 불빛에 익숙해지자 지금의 불꽃축제를 보는 듯이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아니 나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다 그랬다. 어른들은 대구역 물탱크로 쏘는 것을 알고 있어서 걱정을 많이 했었다. 그러나 북한군이 쏜 대 포탄은 하나도 거기에 적중되지 못했다. 다행이다. 만약 물탱크가 북한 대포에 맞아 터졌더라면 증기기관차에는 물이 없어 경부선은 마비되었을 것이다.
어느 날 저녁에는 대포가 날아갈 시간인데도 불꽃이 날아오지 않아 오늘은 왜 안 쏘노, 빨리 쏘지 하면서 철없게 구시렁거리기도 했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철없는 나를 보며 혀를 끌끌 차시며 어서 방에 가서 자라고 하셨다. 그때 비슷한 시기에 우리만 당할 수는 없다는 듯이 지원군이 화력을 유학산 쪽으로 쏘기도 했다.
대구의 서쪽 와룡산 정상에는 언제 올라왔는지 밤마다 미군 탱크 여러 대가 일렬종대로 서서 북쪽을 향해 대포를 수없이 연달아 쏘았다. 멀리서 그 관경을 볼 때마다 마음이 든든했다. 밤낮으로 주인이 바뀌던 다부동 유학산 전쟁은 날이 갈수록 더 치열해졌다. 그곳이 무너지면 대구가 적의 수중에 들어갈 위중한 시점에서 내가 살던 동네와 접해있던 일제가 만든 경마장에도 밤새 소리 없이 미군들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L-19(잠자리비행기) 여러 대가 들어와 기수를 북쪽을 향해 서있었다. 가끔 비행기 몇 대씩 짝을 지어 뜨고 내리기를 반복했다.
어느 날 오후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비행기 한 대가 날아오르다가 튀어 나온 바퀴가 전깃줄에 걸려 다이빙하듯 공중에서 한 바퀴 돌다가 논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그걸 보고 미국 비행기가 대단한 줄 알았는데 저렇게 가느다란 전깃줄에 걸려 넘어지는 걸 보고 힘이 없구나 참 안타까워했다.
이튿날 학교에 가다 보니 경마장 트랙에는 새로운 활주로가 생겨났다. 어제 떨어진 비행기가 울퉁불퉁하던 풀밭 활주로 때문이라고 판단했는지 밤새 그 자리에 구멍 뚫린 철판으로 쫙 깔았다. 비행기가 늘어나고 탄약고가 들어오자 미군들은 밤새 조립식 활주로를 건설했다. 어릴 때 내가 본 그 철판은 지금 예천 회룡포를 드나드는 뿅뿅 다리에 상판으로 쓰는 구멍 뚫린 그런 철판이었다. 어느 신문사 기자가 그걸 보고 신기한 듯 사진까지 찍어서 신문에 실었기에 나는 일부러 회룡포에 갔다. 그걸 보고 6.25 전사가 여기까지 왔구나 하고 다리를 밟아 보고 돌아왔다. 전쟁이 휴전되고 뿅뿅 철판은 건축현장에서 오랫동안 인부들의 안전한 발판 구실을 했다.
미군들의 수도 불어났다. 우리는 늘 철조망조차 없는 미군부대 옆길로 학교에 갔었고 마을 어른들도 그 길을 따라 시내 장으로 오고 갔다. 모를 심은 지 조금 지난 때이지 싶다. 모포기들은 모두 살아나서 꼿꼿하게 서있었다. 논에는 알맞게 물이 찰랑거렸다. 나는 집으로 오다가 무엇을 보고 검정 고무신을 논두렁에 벗어놓고 그리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우리가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것이 숱하게 버려져있었다. 나는 눈에 띄는 것은 모조리 주웠다. 어느 작은 봉지를 뜯어보니 맛이 아주 쓴 검은 가루도 있었다. 설탕 봉지도 있었다. 또 통조림도 있었다.
그 후에도 맨발로 또 그 논에 들어가니 거기에는 아주 예쁜 빈 유리병이 여러 개가 눈에 보이길래 얼른 주웠다. 그것은 지금도 우리가 즐겨 찾는 작은 코카콜라병이었다. 가까이 보니 허리는 가늘어 잘록하고 긴 주름치마를 입은 여인 같았다. 처음 만져봐도 갖고 싶은 병이었다. 나는 그 병을 모조리 주워 집으로 가져왔다.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주운 빈 콜라병을 보여드렸다. 보시더니 참 참하다 어디서 주웠노 하시면서 다음에도 이 병이 눈에 띄거든 주워오라고 하셨다. 내가 무엇에 쓸려고 하는지 물어보니 참기름 병이나 들기름 병하면 좋겠다고 하시면서 남은 것은 이집 저집 갈라주면 얼마나 좋겠냐고 하셨다.
그 후도 나는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콜라병을 많이 주워왔다. 그 병들은 우리 집에서 하나도 깨지 않고 오래오래 아끼며 썼다. 전쟁 중에도 미군들에게는 개인 생활시간을 주는지 해가 나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거나 말거나 빨가벗고 일광욕을 즐겨 했고 젊은 병사들은 우리가 보고 있는데도 거기를 잡고 자위도 했었다. 무더운 날 저녁이 되면 우리 동네 공동샘에 와서 빨가벗고 두레박으로 떠올린 찬물로 샤워도 했다. 그것도 모른 채 저녁에 샘터에 나온 부녀자들은 깜짝 놀라 기겁해서 도망가고 그 다음날부터는 그 샘으로 다시는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걸 언제 보셨는지 들었는지 "그놈들 사람들이 나댕기는데서 그 짓을 하다니 참 뻔치도 좋다"라고 하셨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수륙만리 떨어진 이국땅에서 이글거리는 죽음의 포탄이 시도 때도 없이 머리 위로 날아가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 앞에 그들은 한순간이나마 죽음의 공포를 잊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가끔씩 저녁이면 그들은 떼를 지어 우리 동네로 들어와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느릿느릿 돌아다녔다. 마당 한편에 모깃불을 피우며 온 가족이 살평상에 앉아 부채질을 하는 모습이 신기한 듯 카메라에 담고 또 담았다. 봄이 오면 하중도에는 유채꽃 축제가 열린다. 그러나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열리지 않았다. 6.25전쟁 때는 이곳이 포로수용소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1950년 한여름이었다. 유학산 전투가 치열해짐에 따라 적 포로들이 갑자기 불어나기 시작했다. 군은 이 포로들을 수용할 마땅할 장소가 없자 임시로 노곡동 앞섬 같은 하중도에 전쟁 포로들을 수용할 군용 천막을 치고 잡은 포로들을 이곳에 수용했다. 집총한 헌병들은 둘러친 철조망 앞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감시했다. 포로들은 수시로 군용트럭에 실려 들어오기도 했고 어떤 날은 어디로 가는지 포로들이 많이 실려가기도 했다. 이때 포로들의 등에는 흰 페인트로 POW(전쟁 포로)라는 큰 글씨가 쓰여있었다.
그때 하중도는 완전한 섬의 형태가 아니었고 한쪽이 노곡동과 붙어있었다. 그 후 건축붐을 타고 모래의 수요가 급증하여 하중도의 한 모서리가 모래 파내기가 쉬워 파다보니 산과 떨어져 섬이 되었다.
전쟁이 일어나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 학생들은 일선 장병 위문편지를 자주 썼다. 나도 여러 번 썼다. 6학년 때이지 싶다. 어느 날 조회시간에 교장선생님께서 저 혼자만 교단으로 부르셨다. 저는 영문도 모른 채 선생님 앞으로 나갔다. 편지 겉봉의 한쪽이 불에 타고 남은 누런 봉투 하나를 저에게 주셨다. 그 봉투는 봉하지도 않았고 봉해질 수도 없는 상태였다. 교장선생님은 봉투의 상태며 벌어진 내용까지도 설명하셨다.
조회를 마치고 우리 반으로 돌아온 나는 담임 선생님에게 드렸다. 선생님은 우리가 5·6학년이었을 때 2년간 우리 반 담임을 맡으셨다. 선생님은 우리 반 학생들이 다 듣도록 그 편지를 큰소리로 읽으셨다. 사실 나는 그 편지를 언제 써 보낸 편지의 답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하도 많이 쓰고 보내서 답을 써 보낸 장병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
화랑 담뱃갑을 뒤집어쓴 간결한 답장에서 그는 탱크 운전병이고 서울의 어느 신문사 사장의 둘째 아들이라고 했다. 이 전쟁이 끝나면 우리 한번 만나 자라는 말이 맨 끝에 쓰여 있었다. 겉봉은 내가 써 보낸 편지봉투를 뒤집어 내가 적은 대로 학교 주소를 다시 써서 우리 학교 주소로 보내왔다. 그 후 그가 어느 산골짝에서 죽었는지 그의 편지는 영영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전쟁은 그 끝이 어디인지 모르게 우리에게 가까이 번지고 있었다. 나는 정든 달서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그때 국가시험을 거쳐 대구 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보니 5학년이 남아 있었다. 몇 달 지나 그 학생들은 어디로 가고 그해 6년제는 없어지고 중3년 고3년제가 되었다. 지금 대봉 파출소 동편 편창공장에서 가마니로 바닥을 깐 교실에서 공부했다.
중학교 다닐 때는 걸어 다녔다. 한 시간 반 걸렸던 원대동에서 대봉동까지는 어린 내게는 멀었다. 버스는 있기는 해도 출발지가 대구역이라서 거기까지 둘러 가느니 친구들과 나는 그냥 걸어 다녔다. 집에서 달성 국민학교를 지나 원대 건널목에는 수시로 딸랑딸랑하며 차단기가 내리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서 기차 탄 사람들에게 무심코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자갈마당을 지나 달성 공원 앞 네거리에서 지금의 오토바이 골목을 보면 개울이었다. 대구 시내 여러 집에서 쓰고 버린 시커먼 물이 작은 개울이 되어 흘렀다. 나는 그 개울 동편 인도로 가고 오고 했고 건너편에는 일본인들이 살았던 크고 넓고 정원수가 있는 좋은 집들이 있었다. 큰 비가 내리는 여름에는 인도와 그 서쪽 일본 집들 사이를 걸친 다리는 여름철마다 몇 개씩 늘 떠내려갔다. 그뒤 다리는 트럭의 프레임 두 개를 연결하여 견고한 다리가 되어 오래 사용했다. 지금 그 길은 대구시가 복개하여 오토바이 골목이 됐다.
동산 파출소를 지나 약전골목에 가다 보면 집집마다 멍석위에 생약재를 널어 말리는 약 냄새가 많이 났었다. 또 약전골목 중간에는 유명한 대남약방에서 임신부들에게 진맥을 잘해 뱃속의 아이를 남녀인지 구별을 했다. 훗날 어머니는 거기 가니 너를 정확히 진맥했다고 하셨다.
중앙 파출소를 지나 삼덕 우체국까지 가서 우측으로 건너면 사대부고, 대구상고, 가다쿠라 잠사 공장까지 가는 길이다. 뒤에 대구중학교는 지금의 학교로 이사하여 거기서도 마루판을 놓고 가마니를 깔고 공부했다. 아침마다 삼덕 우체국에서 우리 학교까지 가는 길에는 수많은 미 공군 장병들과 미팔군 장병들이 늘 우리와 마주쳤다. 아침마다 아무리 마주쳐도 얼굴을 분간할 수 없었다. 후에 내가 카투사에 있을 때 미군들이 도로 내게 그런 말을 했었다.
중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교 시에 원대 건널목을 지날 그때 희한한 광경도 여러 차례 목격했다. 도로와 철로를 겸용하는 미군 특수 트럭이 건널목까지 와서는 철도 위로 올라가 양쪽 바퀴를 철로 위에 정착시키더니 작은 바퀴를 내려 서울 방향이나 부산 방향으로 달려갔다. 정식 정거장에서는 철로와 승객이 타고 내리는 높낮이 때문에 철로 위에 올라가기가 불가능했었다. 그 트럭은 정거장이 아닌 건널목만 있으면 어느 쪽이든 운행이 가능했다. 그래서 급박한 전쟁 중에는 시간이 절약되어 편리하겠다고 생각했다.
대구가 위태위태한지 어느 날 새벽에 경찰관이 우리 마을에 와서 구장도 찾고 소임도 찾았다. 그리고는 이 동네 집집마다 키우고 있는 가축들을 모조리 잡아죽이라고 하면서 소임을 시켜 동네를 돌며 크게 외치라고 하고는 급히 다른 마을로 갔다. 구장은 적군이 들어오면 가축들은 적군의 영양식이 될 것이고 개는 총소리에 놀라 미쳐서 사람들을 문다고 했다. 그 당시 농촌지역에서는 집집마다 개를 비롯하여 한 가지 이상 가축들을 길렀다. 개는 집도 지키고 돈도 되었다.
사람과 사람의 싸움에서 정든 가축들은 영문도 모른 채 주인들의 손에 무참히 죽었다. 사람의 피 냄새가 나기 전에 가축들의 피가 온 마을을 적셨다. 그중 소와 말은 덩치가 커서 너른 장소와 여러 사람의 손이 필요했다.
우리 집 사랑채와 담 사이에 알맞은 공간이 있었다. 그곳에서 밤낮을 구별 없이 그 짓이 벌어졌다. 소머리를 오함마로 치는 큰 일은 동네 소임이 늘 맡았다. 다른 일은 여러 어른들이 손을 보탰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동네 사람들에게 칼이 가는 대로 한 뭉텅이씩 나누어 주었다. 사람을 죽여야 계급이 오르고 더 많이 죽이면 훈장도 타던 그 시절 가축의 죽음을 보고 슬퍼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나중에는 몇 달 전에 태어나 풀밭에서 우리들과 폴짝폴짝 뛰던 귀여운 송아지도 우리 집으로 왔다. 어린 송아지는 며칠 전 죽은 어미의 피 냄새를 맡았는지 우리 집 대문간 문턱에 두 다리를 앞으로 뻗치며 음메 음메 제 엄마를 부르다가 성난 소임이 내려치는 오함마에 맞아 눈도 감지 못하고 짧은 순간에 생을 마감했다. 구경 오신 동네 어른들은 가져갈 생각은 없는지 먹고 싶어 그랬는지 한쪽에서 이미 불을 피우며 새끼 고기가 보드랍다고 연신 입속에 넣었다. 이때 누가 나를 보고 "니는 왜 안 묵노? 빤히 보고만 있노?" 하셨다. 어른들의 성화에 멋모르고 처음으로 구운 송아지 고기를 먹었다. 맛이 없었다. 익지 않은 과일이 제 고유의 맛을 채우기 전에 맛이 없듯 송아지도 다 자라야 맛이 나는구나 하며 혼자 속으로 짐작했었다.
5. 징집
청년들이 징집되어 정든 가족과 이별하고 간 마을에는 개 짖는 소리마저 사라지자 마을은 대낮인데도 조용했고 간간이 전쟁의 두려움이 마음속으로 기어들었다. 그래서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불안했다. 동네 사람들을 만나면 긴 이야기는 않고 간단한 수인사만 하고 지나갔다.
전쟁이 난 그 해 여름이었다. 구장의 음모가 그날 오후 우리 집에서 일어났다. 아버지는 그날 아침 일찍 논에 가셨다. 심어 놓은 벼논에 두벌 논매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따로 떨어져 있던 두마지기 되는 논을 혼자 손으로 다 매시고 점심때가 지난 오후에 집으로 오셨다. 늦은 점심을 잡수시고 사랑채 툇마루에서 주무시고 계셨다. 그때 구장이 밖에서 놀고 있는 나에게 "느그 아부지 집에 있나?"하고 물었다. 철이 없고 꾀도 없이 순진하기만 했던 나는 "지금 주무시고 계시는데요."했다. "어디서?", "사랑채 툇마루에서예."하는 순간 옆에 서 있던 경찰관이 구장을 부르며 아버지가 도망갈까 봐 자기가 섰던 그 자리에서 지키게 하고는 나를 앞세우고 사랑채 쪽문으로 들어섰다.
마루에서 목침을 베고 주무시던 아버지를 보고는 "이 사람이 느그 아부지가?"했다. "예" 경찰관이 아버지를 흔들어 깨웠다. 잠결에 일어나신 아버지는 전란통에 경찰관이 왜 찾아왔는지 짐작이 가는지 그를 쳐다보기만 하고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다.
"어서 일어나 옷을 입으시오."
아버지는 일어나 흰 무명바지와 저고리를 입으시고 흰 고무신을 신었다. 어서 갑시다라는 경찰관은 어디서 나온 누구이며 아버지의 인적사항은 기록하지 않고 어디로 무엇 때문에 잡아가는지조차 설명을 하지 않았다.
경찰관은 아버지를 앞세우고 우리 집을 떠났다. 아버지는 골목길을 돌아가실 때 고개를 한번 돌려 저를 보시고는 그 길로 어디론가 경찰관과 가셨다. 그때 아버지 연세는 42세였다. 서문시장에서 장을 보시고 해거름에 집으로 돌아오신 어머니는 선 채로 내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까물어쳤다.
좌우로 뺨을 몇 대 맞고 깨어나신 어머니는 애가 타서 본 정신이 아니었다. 이튿날부터 아버지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 백방으로 쫓아 다니셨다. 어머니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보다 신의 힘에 의지하고 싶었다. 용하다는 점받치를 다 찾아 다녔지만 전쟁중이라서 그런지 그들도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집에만 있으면 간조증이 나서 참소리나 헛소리도 다 듣고 싶었다.
그때 대구에서 제일 용하시다는 점받치는 장참봉과 이참봉이었다. 어머니는 거기 갈 때 마다 "총 들고 전쟁터에는 안갔으니 안죽느마. 곧 올끼구마."하는 들으나마나한 그 한마디 소리도 붙잡고 싶어 늘 거기에 갔었다. 그곳에는 전쟁 통에 잃어버린 가족을 찾는 손님들이 방마다 늘 바글바글하다면서 그 사람들로부터 무슨 소식이라도 듣고 싶어 거기에 있다가 해거름에 집으로 돌아오시곤 했었다.
어머니는 그날부터 우리 집 대문을 열어 두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구장과 골목에서 마주쳐도 인사도 안하시고 받지도 않았다. 그날 경찰관과 구장은 아버지와 같은 또래 친구들을 보고서도 그대로 지나치고 우리 집으로만 곧장 온 것은 누군가가 처음부터 콕 집어 아버지 혼자만 데리고 간 사실에 골이 나서 어머니는 "그 놈이 우리하고 무슨 원수가 져서 그랬노 얼마나 대접을 잘 받았으면 그랬노 잘 묵고 잘 살아라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이 야시 같은 놈아!" 라고 고함쳤다. 그날 이후 경찰관은 우리 마을에 다시는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어디에 있을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는지 어느 날 군용차량과 내려오는 피난민 사이를 비집고 혼자 다부동 고개로 아버지를 만나러 걸어 가셨다. 그러나 동명에도 못가 군인들의 제지로 돌아오고 말았다. 전쟁터에서 여자의 적은 남자라는 말을 듣지 못했을까 그때 만약 적군에 붙잡혀 갔더라면 온갖 못된 짓을 다 당하고 끌려 다니다가 그들이 이용 할대로 다하고 나면 자기네 정보를 결국에는 전한다는 이유로 총살까지 당해야만 끝이 났다.
어머니는 식구들의 일이라면 어디라도 가서 자기 눈으로 꼭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일정시대에는 아버지가 동촌비행장 활주로 공사로 여러 달 동안 보국대로 거기 있을 때였다. 동촌 비행장으로 가는 길을 몰라 내 손목을 잡고 물어물어 철길을 따라 동촌 비행장까지 걸어가서 아버지를 만났다. 나는 게다를 신고 가다가 철길에 깔린 자갈에 여러 번 걸려 넘어진 기억이 지금도 난다. 또 내가 군에 있을 때는 근무하던 부대까지 찾아 부산까지 오시기도 했다. 그때 동료들은 오랜만에 포식했다고 어머니가 철조망 밖으로 나가실 때까지 서서 어머니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손을 흔들었다. 친구들을 보낸 나는 어머니가 가보고 싶어 했던 범어사에 갔었다.
어머니는 흰 치마저고리에 흰 고무신을 신으셨고 나는 군복에 모자를 썼다. 대웅전 앞에서 찍은 사진도 이제 늙었는지 누렇게 변했다. 어머니마저 저 세상으로 가신 지 벌써 26년이 됐다.
6. 귀가
아버지는 그해 끄트머리쯤 되던 어느 날 밤 집으로 돌아오셨다. 밤이 이슥한 시간 우리 대문 앞을 지나던 동네 아주머니가 누워 있는 사람을 발견하시고 열린 대문으로 어머니를 찾아 들어와 "나와 보소"하면서 선잠 자던 어머니를 깨웠다. 어머니 곁에서 자던 나는 그 소리에 덩달아 일어났다.
"뭐 때문에 이카노?"
"대문밖에 이 집 양반이지 싶은 사람이 누워 있구마. 퍼뜩 나와 보소."
이 집 양반이라는 말 한마디에 마음이 급해진 어머니는 아주머니의 뒤를 따라 나왔다. 캄캄한 대문 밖에서 내가 쥔 기억자형 녹색 군용 전등으로 모로 누운 사람의 얼굴을 비추자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바짝 다가앉고는 아버지의 얼굴을 덮은 헝클어진 긴 머리와 긴 수염을 이리저리 뒤로 젖히고 드러난 귀를 요리조리 만져 보시고 얼굴을 빤히 보시더니 벌벌 떨며 큰 소리로 울었다. 그동안 손바닥이 닳도록 빌며 소망했던 일이 갑자기 눈앞에서 현실로 나타나자 꿈인지 생시인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버지는 평생 동안 손수 만든 목침 하나만 베고 모로 누워 주무셨다. 오랫동안 그렇게 주무셔서 아버지의 양쪽 귀는 레슬링 운동선수처럼 찌그러지고 울퉁불퉁 하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그 귀 모습을 예사로 보시지 않고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모양이다. 혹시 불행하게도 아버지가 터지는 포탄에 맞아 육신이 산지사방 흩어져도 그 귀 하나만 쥐고도 아버지를 찾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빈속으로 하루 종일 자갈길을 걸어 우리 집까지 찾아오시고는 마음의 긴장이 순간적으로 풀리듯 대문 앞에서 술 취한 사람처럼 넘어지고 말았다. 기운이 고갈된 아버지는 이제 일어나실 기운도 없었다. 모든 면에서 늘 병사들의 후순위로 밀리는 지게부대원을 집으로 보내는 날이면 이른 아침 아무것도 주지 않고 빈손에 빈 입으로 보냈다. 아침 주먹밥도 얻어먹지 못하고 미친 듯이 달리는 군 트럭의 먼지 속에서 사랑하는 가족들이 눈에 밟혀 하루 종일 많이 걷고 짧게 쉬기를 반복했었다고 하셨다.
우리 집 마당에는 동네 사람들이 한분 두분 모여들자 어머니는 배급받은 왜지름(석유)을 호야등에 가득 채워서 불을 붙여 심지를 홰가 나도록 돋우고는 처마 끝 높은 곳에 내다 걸었다. 그때서야 아버지의 고생한 몰골이 전부 드러났다.
산송장이었다. 남이 보면 누구인지 모를 정도였다. 몸은 마를대로 말라 뼈만 남은 얼굴에는 살 한 점 없고 광대뼈만 유난히 튀어 나왔다. 거미 다리같이 마른 다리와 손가락을 보시던 동네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축이 많이 났네. 축이 많이 났다. 저렇게 말라서 한 오십 근(30킬로그램)이나 나가겠나"하시면서 혀를 끌끌 차시며 몹시 안타까워 하셨다. 목마름과 허기를 참고 한 여름 더위까지 지고 산을 오르내리기를 얼마나 했으면 몸이 저리되었을까 하시면서 불쌍 하시다고 여기저기서 눈물도 흘리셨다.
이때 어머니는 손바닥으로 땅을 치시며 "원통하다. 그 놈 잘 되는가 보자"하시면서 여러 번 고함을 질렀다. 그날 밤 또래 친구들은 모두 우리 집에 모였으나 그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후에도 그놈이 우리 집 앞을 지날 때에는 눈길을 다른데 두고 지나갔다. 아버지는 거지 중에 상거지였다. 집을 떠난 후 한번도 빨지 못한 옷에는 온갖 냄새가 진동했다. 걸친 옷만 봐도 얼마나 죽을 고생을 하셨는지 단번에 표가 났다. 지게 진 양쪽 어깨 피부는 다 해어져 진물이 나고 있었다. 떠나실 때 입은 흰 바지저고리는 바위 모서리나 나무가시에 스쳐 성한 데가 한곳도 없이 해졌고 땀과 피와 전쟁의 온갖 때가 범벅이 되어 누렇고 어두운 자연 위장복이 되었다. 비가 오면 그때 선채로 얼굴을 씻고 입은 채로 구정물로 빨래를 하시고 해가 나면 서 있는 그대로 걸어가는 옷걸이가 되어 젖은 옷을 말렸다.
7. 지게부대
아버지가 유학산으로 들어 가실 때는 50년 7월 말이었다. 그때는 지게부대라는 용어가 없었다. 경찰관이 길이 없는 산에서는 모든 전쟁물자의 운반은 지게가 편리한 도구라고 판단하고 농사를 짓고 지게를 져본 나이가 어중간한 민간인들을 수시로 잡아다가 군에 인계했다.
지게부대원의 임무는 전투에 꼭 필요한 물자인 탄약과 유류, 주먹밥을 운반하고 부상자 후송, 죽은 병사의 사채매장, 교량복구, 진지구축, 도로보수였다. 산에서 지게는 최상의 운반도구였다. 그때 참전했던 미군들도 그것을 보고 세계에서 유일한 도구라고 칭찬했고 덜 무거운 것은 그들도 지게에 얹어 지기도 했었다. 세워 놓은 지게가 알파벳 A를 닮았다고 해서 한국 노무자를 지게부대(A Frame Army)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한국 노무자라는 명칭은 아버지가 귀가 하신 후 이듬해인 51년 5월 대구 노무단 양성소에서 전쟁에서 필요한 기초훈련을 받고 각 군에 배치된 노무자를 일러 말하는 것이다.
유엔군은 전투 병력의 급격한 감소를 절감하고 탄약과 유류를 전장에 신속히 운반하기 위해 민간인 노무자로 이루어진 한국 노무단(KSC.Korea Service Corps)을 창설했다. 아버지가 잡혀 갈 때에는 군과 경찰 어느 쪽에서도 잡힌 자의 인적사항을 기록 보관하지 않아서 전쟁터에서 그들이 죽으면 거기까지였다. 그래서 사망 통지서가 오기는 난망이었다.
더 내려갈 곳도 더 올라갈 곳도 없는 지게부대원은 같은 장소에서 군인들과 같이 목숨을 걸고 전투에 참가해도 대우는 비참했다. 계급이 없다. 진급도 없다. 따라서 봉급도 없다. 훈장도 없다. 어깨 골이 다 파여도 휴가도 병가도 면회도 없다. 쓸모없는 몸이 되면 그때서야 풀어주는 것 뿐이었다. 하산시에는 지게에 시체나 부상 당한 군인을 한명씩 지고 내려 왔다. 늘어지는 시체는 피아의 구분없이 작은 골짜기를 메워 나갔다. 부상자는 산 아래 붉은 적십자 마크가 그려진 천막 안으로 이동 시켰다. 밤이 왔는데도 거기엔 밤을 도로 쫓아내고 있었다.
조명탄을 훤하게 대낮같이 밝히면 새로운 전투가 시작된다. 낮에 숨죽였던 살기가 되살아나 한강 이남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이 되었다. 눈을 감으면 내가 죽고 남을 죽여야 내가 살았다. 바람 한 점 없이도 끊임없이 따라 오는 화약 냄새, 간고등어 썩는 것 같은 송장냄새, 죽은 군마의 지독한 냄새.
이곳은 어제와는 딴 세상이었다. 밤도 밤이 아니었고 낮도 낮이 아니었다. 크고 작은 죽임의 탄환이 비명을 지르며 꼬리를 물고 이쪽저쪽으로 날아들고 날아갔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부상자는 이곳저곳에서 엄마를 부르며 살려 달라고 천막 밖으로 기어 나왔다. 시체를 보고 누가 북한군인지 쉽게 구별하는 방법은 죽은 병사의 옷을 보고, 여의치 않으면 양쪽 팔을 걷어 올려 보면 쉽게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죽은 북한군의 대부분은 시계를 좌우 양팔에 차고 있었다. 그 시계 전부는 미제나 일제였다. 태엽이 다 풀렸는지 시계바늘이 정지된 것도 있고 아직도 돌아가는 것도 있었다. 바늘이 정지된 시계는 오래전에 죽은 미군병사의 것이고 아직도 돌아가는 시계는 어제 오늘 죽은 미군의 시계이다. 미군들도 죽고 자신들도 죽어 시계는 북한으로 가져가지 못했다. 북한군이 고향을 떠날 때 이 시계를 끼고 전장에 온 것은 아니다. 전투하다 죽은 미군의 손목에서 빼어 내어 자기 팔에 줄줄이 꿰어 찬 것이다. 얼마나 탐이 나서 그랬을까. 이 전쟁이 자기들의 계획대로 그해 8월 15일 부산까지 점령하는 날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형제들에게 증표로 나누어 줄 것이라고 기대해 부풀었을 것이다.
8. 에필로그
전장에는 총을 든 군인들만 전쟁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이는 군인들 뒤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그들의 뒤를 받쳐주는 군인 아닌 비무장 군인이 있었다. 약실에 장전된 탄약이 다 소진되고 나면 병사가 손 닿을 수 있는 곳에 탄약은 늘 공급되어 있어야 중단 없이 전투를 할 수 있어서 그 결과 병사는 살고 그 전투가 승리할 수 있다. 탄약이 소진되면 높은 고지에서는 더욱 더 절실하다. 병사가 손쉽게 사살할 수 있는 적을 그냥 보고만 있다가 도로 병사가 죽음을 당하는 경우도 발생했었다.
이 비극적이고 억울한 사건을 사전에 막을 부대가 필요했다. 이 부대가 지게부대이다. 말이 부대이지 이 부대원들은 50년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난 후 대구 지역에서도 그해 50년 7월부터 소집 통지서 없이 동네에 나온 경찰관이 구장의 말만 듣고 나이 어중간한 민간인들을 마구 잡아 전장에서 필요한 기초 훈련도 없이 그날 저녁 바로 전장에 투입시켰다.
아버지는 그해 7월 말경에 혼자 강제로 입영되었다. 그때 잡혀간 지게부대원의 신상명세서가 군과 경찰 어느 곳에도 작성되지 않아 없었다. 그 결과 군인이 사망하면 기록에 따라 집으로 통지하고 지게부대원이 사망하면 신상명세서가 없어 그 가족에게 통지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됐다. 이런 상황은 이듬해 1951년 5월 대구노무단양성소가 생기기 전까지 계속 되었다.
이런 상황이 여기에서 끝날 비극이 아니었다. 휴전 후 적어도 20년 이전에 신문광고라도 해서 그때까지 살아 계시는 지게부대원을 찾아 직접 그 현장으로 달려가서 유해를 발굴했더라면 죽은 자의 유해와 군복, 인식표가 그대로 발굴되어 쉽고 빠르게 여러 나라의 많은 유해를 발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통탄해서 무릎을 치고 또 쳐도 이제는 찾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아버지 가신 지 36년이 지났다. 살아 계시면 112세 기유생이다. 아마 다른 분들도 저 세상으로 가신 나이다. 1972년 아버지와 그 당시 내가 근무했던 안동으로 버스를 타고 가다가 다부동재를 넘어설 때였다. 아버지는 손가락로 유리창을 푹푹 찌르듯이 이 봉우리 저 골짜기를 가리키며 "그때 내가 숱하게 져다가 묻었지"하셨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하고 군은 근 50년이 지난 2000년이 되어서야 유해 발굴 작업을 시작하여 기록물 없이 넓은 산야를 뒤진들 결과는 늘 뼈 몇 조각. 그것도 자랑이라고 하는가. 지금도 이곳 유학산 )을 지날 때는 무심코 내 시선은 골짜기를 찾아 헤맨다. (127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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