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문인화가 이인상은 부채그림을 많이 그렸다. 오십 평생에 그린 수십 점이 전하는 가운데 약 15점이 부채그림인데 하나하나가 똑똑 떨어지는 정성들인 작품이다. 부채그림은 부채꼴에 맞춰 구도를 잡아야 하는 어려움도 있지만 접혀진 선면을 펴서 고정해 놓고 그려야 해 붓이 잘 나가지 않는 까다로움도 있다. 부채그림을 이인상은 왜 많이 그렸을까. 원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의 화풍이 주는 서늘한 기운이 부채에 잘 어울리기도 하지만, 가난한 이인상이 친구들의 호의에 답례하는 최상의 수단이기도 했을 것 같다. 그림과 글씨로 이름이 났으면서도 사류(士類) 사이에 정평이 있는 개결한 성품이어서 이인상의 그림부채라면 누구 앞에서 펼치더라도 뿌듯했을 것이다.
이인상은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경여의 고손자였으나 증조부가 서출이었기 때문에 서자라는 불우한 처지였다. 조선을 통틀어 4대 명문으로 꼽히는 집안의 후광은 충분해 당대 일류 문인들과 사귀었으나 관계나 학계, 문단에서 출세할 수는 없었다. 이 때문에 이인상에게 그림은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고 자적(自適)할 수 있는 어쩔 수 없는 마당이기도 했다.
푸른 행전으로 펄럭거리는 바지를 싸매고 산길을 올라온 그림 속 고사(高士)는 홀로 바위에 앉아 있다. 폭포를 보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눈길이 향하는 곳은 바위틈에서 몸통을 굽혀 자라면서도 웅장하게 가지를 뻗은 소나무인 '폭하관송'(瀑下觀松)이다. 그래서 이인상의 서화를 평석(評釋)한 대저를 저술한 박희병 선생은 이 그림 제목을 '송변청폭'(松邊聽瀑)이라고 했다. 폭포소리에 귀를 씻으며 소나무를 바라보는 인물은 이 부채그림을 그려준 친구 위암(韋菴) 이최중일 것이고 세찬 폭포, 기이한 소나무, 바위는 그의 사람됨을 상징할 것이다. 화제는 읍취헌 박은의 시 '유역암'(遊櫪巖) 중의 두 구인데 몇 글자는 다르다.
노폭홀성암외향(怒瀑忽成嵓外響) 부운욕결일변음(浮雲欲結日邊陰)
추일(秋日) 상(上) 소호로(小葫蘆) 남강(南岡) 사(寫) 병위(病韋) 선면(扇面)
(성난 폭포소리 홀연히 바위 밖에 메아리치고, 뜬 구름 맺히려니 해 주변이 어두워지네.
가을날 소호로의 남쪽 언덕에 올라 병중에 있는 위암의 부채에 그리다)
한 구안자(具眼者)의 이인상에 대한 평론은 이렇다. "이인상의 묘처(妙處)는 농(濃)에 있지 않고 담(淡)에 있으며, 숙(熟)에 있지 않고 생(生)에 있다. 오직 아는 자만이 이것을 안다." 그림의 맛을 알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눈이 다 있는데도 안목(眼目)이 있다느니 없다느니, 높다니 낮다니 한다. 화려한 그림과 담담한 그림, 노련한 그림과 대교약졸의 그림은 각각의 특징으로 서로 다른 기쁨을 준다. 제각각의 매력을 다 느끼려면 방법은 많이 보는 수밖에.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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