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벽시계가 떠난 자리
박현수(1966~ )
벽시계를
벽에서 떼어놓았는데도
눈이 자꾸 벽으로 간다
벽시계가
풀어놓았던 째깍거림의 위치만
여기 어디쯤이란 듯
시간은
그을음만 남기고
못 자리는
주삿바늘 자국처럼 남아 있다
벽은 한동안
환상통을 앓는다
벽시계에서
시계를 떼어내어도
눈은 아픈 데로 가는 것이다
「시계가 걸렸던 자리」가 아니라 「벽시계가 떠난 자리」이다. '걸렸던'과 '떠난'…! 구효서 소설과 박현수 시가 어떻게 다른지는 모르겠다만. 시인의 고향 봉화 어디쯤이 생각난다. 그때 나는 진종일 무거운 통나무를 어깨에 메고 나르던 산판 상차꾼이었다. 분천역이 멀지 않은 곳이었다. 옥수수가 익어가던 무렵이었다. 우리 일행은 산중 외딴집 방 한 칸을 빌려 숙식을 해결했었다. '시간은/ 그을음만 남기고' 사라지는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잊혀 있다가도 어떤 기억은 그때보다 더 선명히 떠오를 때가 있다.
지금 그 집은 어떻게 됐을까. 이 디지털 시대에, 아서라 아서 '구름도 울고 넘는 울고 넘는 저 산 아래' 고향무정 이야기는 하지 말자. '벽시계에서/ 시계를 떼어내'면 '벽'만 남는데 이때의 벽이란 계층 간의, 이념 간의, 성별 간의 그런 벽이 아니라 한 인간이 견뎌낸, 한 인간이 상실한 시간들에 대한 벽. 조금 오버를 하자면 남녀(부부) 간의 벽이라 하는 것이 옳겠다. 세대 간의 벽이라 하는 것이 옳겠다.
누구나 다 혼자다. 마음의 벽이 생기면, 환상통이 아니라 우리는 실제로 통증을 느낀다. 너와 내가 공유했던 시간은 사라지고 덩그러니 시계처럼 아픔만 남아 있다.

시인 유홍준:1998년 『시와반시』로 등단. 시집 『喪家에 모인 구두들』 『나는, 웃는다』 『저녁의 슬하』 『북천-까마귀』 『너의 이름을 모른다는 건 축복』이 있다. 시작문학상 이형기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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