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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칼럼] 나 때는 말이야….

박양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지난 22일 오전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에서 열린
박양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지난 22일 오전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에서 열린 '철인 3종경기 선수 가혹행위 및 체육 분야 인권침해에 대한 청문회'에서 고 최숙현 선수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묵념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병구 편집국 부국장
김병구 편집국 부국장

"나 군대 생활 할 때는 말이야. 매일 밤 세면장으로 불려가 고참병에게 엉덩이에 피가 나도록 맞았어. 나중엔 팬티가 살에 붙어서 떼어 내기 힘들 정도였지. 매일 맞았는데, 하루 안 불려 가면 새벽까지 불안해서 잠을 못 잤어. 요새 군대는 군대도 아니야. 얼차려 없이 군대가 제대로 돌아가겠어?"

1970, 80년대 군 생활을 했던 분들에게 술자리에서 가끔 듣는 얘기다. 부대 내 구타를 어느 정도 용인했고 얼차려 등이 있어야 군대 시스템이 제대로 굴러간다는 논리가 깔려 있다.

"나도 후배 시절 많이 맞아 봤고, 후배 때나 지금이나 후배가 맞으면 분명 잘못이 있기 때문에 맞는다고 생각했다. 말로 타이르고 주의 주는 건 누구에게나 한계가 있다고 본다. 요즘 후배들, 행복한 줄 알아야 한다. 잘하면 칭찬받고 못하거나 잘못하면 벌받는 건 당연한 건데, 선배들 욕하기 전에 본인이 뭘 잘못했는지 생각해 봐라. 이유 없이 폭력을 가했다면 안타깝겠지만 맞을 짓을 했으면 맞아야 한다."(2014년 5월 유도 올림픽 메달리스트 왕기춘)

왕기춘은 당시 용인대 유도부 훈련단의 체벌 문화 비판 글을 보고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 같은 글을 올렸다. 그는 현재 미성년 제자 성폭행 혐의로 구속 상태다.

왕기춘의 이 글로 봐서 선배는 후배가 잘못했을 때 벌을 줄 수 있고, 그 벌은 구타나 가혹 행위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인식한 듯하다.

군사정권 때까지, 특히 군대나 체육계에 폭행과 가혹 행위가 만연했다. 일제 잔재이기도 하고, 반민주적인 군대 문화가 성행한 탓이기도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1980년대 후반 사회 각 분야에 민주화 바람이 불었고, 이 바람은 군대든 체육계든 공기관이든 반민주적인 문화를 극복하려는 움직임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일각에서 이런 구시대적 병폐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왜일까. 아직도 '고(故) 최숙현 사태'가 되풀이되고 있는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물론 군대 내 모든 선임들이 폭행을 자행하는 것도 아니고, 체육계의 모든 선배나 코치, 감독들이 폭행을 일삼는 것도 아니다.

극소수가 감독이나 선배라는 지위를 이용해 폭언이나 폭행을 가한다는 점에서 체육계 폭력의 주원인으로 개인의 인성 문제를 꼽을 수 있겠다. 이와 함께 체육계에 뿌리 깊게 밴 '성적 지상주의'도 한몫하는 것으로 보인다.

경북교육청은 '전임 코치 계약 관리 지침'에 '개인·단체경기 종목에서 최근 3년간 전국체육대회에서 입상 실적이 없을 때를 해고 사유로 두고 있다. 경북교육청은 이 조항을 근거로 지난 2월 말 코치 3명을 해고했다. 서울과 경기교육청도 비슷한 지침을 유지해 오다 지난해 2월 교육부 방침에 따라 이 조항을 삭제했다.

성적 향상 압박에 내몰린 일부 감독이나 코치들이 기술이나 과학적 훈련 방식은 내팽개친 채 구시대적 폭력만으로 선수들을 옥죄면서 불상사를 부른 경우가 적지 않다. 한마디로 자질이 없는 감독·코치들이 우격다짐으로 성적을 올리려고 하다 보니 결국 꿈나무의 미래를 무참하게 짓밟아 버리는 경우다.

체육계의 성적 지상주의가 청춘들의 꿈과 행복을 앗아가는 일이 더 이상 일어나서는 안 되겠다. 그렇다고 성적 지상주의라는 사회구조적 문제를 내세워 폭력을 정당화해서는 더더욱 안 될 일이다. 폭력을 성적 향상의 수단으로 고집하는 이들은 애당초 감독이나 코치의 자격이 없다.

폭력은 전쟁이나 정당방위 상황을 제외하고 어떤 명분으로도 미화될 수 없고, 어떤 논리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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