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 아편·주석·고무로 살펴본 페낭 화인(華人)의 굴곡사

아편과 깡통의 궁전/ 강희정 지음 / 푸른역사 펴냄

주석은 중국 남부의 가난한 농민들을 불러들이는 한편 중국계 거상들이 부상하는
주석은 중국 남부의 가난한 농민들을 불러들이는 한편 중국계 거상들이 부상하는 '페낭 자본의 시대'를 끌어냈다. 사진은 19세기 주석 러시의 진원지였던 페락 라룻 지역 타이핑의 주석광산의 모습. 푸른역사 제공

동양의 진주로 불리는 '페낭'은 말레이반도 서북부의 작은 섬이다. 말래카해협에 자리잡아 한때 동서 바닷길 교역의 중심지였으며, 영국 식민지풍 건물과 개발의 주역인 중국풍 건물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2008년 도시 전체가 세계 문화유산의 도시로 지정됐다. 최근에는 베트남의 푸꾸옥, 필리핀의 클락과 함께 동남아 여행의 '신 트로이카'로 떠오르는 곳이기도 하다. 이 책은 1786년에서 1930년대 말까지 페낭섬이라는 독특한 시공간에서 생겨난 화인(華人)사회에 관해 '아편-주석-고무'라는 키워드로 동남아의 근대와 화인사회의 역사적 편린을 더듬어 본 것이다.

◆ 아편과 주석, 고무를 축으로 한 생생한 드라마

18세기 후반부터 150여 년간 페낭은 상업자본주의의 세계화와 산업혁명의 세계화가 맞물린 현장이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돈이 열리는 나무' 아편팜, '백색 골드러시'를 일으킨 주석, '근대 산업의 근육' 고무를 키워드로 페낭의 성쇠 과정, 중국과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 등 화인사회의 역사적 축도를 보여준다.

아편은 징세청부제(나라에서 세금을 거둘 때, 일정 금액으로 민간의 조세 청부인에게 도급을 주어 그 사람의 계산에 따라 세금을 거두던 제도)로 자본을 축적하고 비밀결사를 통해 자치권을 행사하는 이른바 '제국 속의 제국'을 형성했던 페낭 혁명의 시대의 상징이었다. 주석은 중국 남부의 가난한 농민들을 불러들이는 한편 중국계 거상들이 부상하는 '페낭 자본의 시대'를 끌어냈다. '악마의 밀크'라는 고무의 개발로 유럽 자본이 침투하면서 기존 거상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제국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거대한 지역 교역망을 형성했던 중국인 이주자들의 구체적 삶을 다층적으로 구성해 다루고 있다. 화인사회의 지도자인 '카피탄 치나'에 처음 임명된 중국 복건성 출신 거상(巨商) 코라이환에서, 오늘날 페낭의 명물인 '페라나칸 맨션 뮤지엄'이 된 '궁전'을 지은 '주석왕' 청켕퀴, 1907년 화인 최초로 말레이국연방 입법위원이 된 룡피까지 신화적 부를 쌓은 인물들이 명멸한다. 여기에 아편팜 주도권을 둘러싼 비밀결사 건덕당과 의흥회의 혈투며 아편과 '광산매점'에 노동력을 수탈당했던 중국인 쿨리(coolie:육체노동에 종사하는 하층의 중국인 노동자)와 저자(猪仔:외국으로 팔려간 해외 중국인 막노동꾼)들의 땀과 눈물, 매음굴의 '여인관'의 참상, 노예에 가까운 중국인 하녀 무이차이들의 한숨 등 피와 땀, 욕망이 어우러진 이야기는 그 어떤 드라마보다 드라마틱하다.

◆이름 없는 화인들의 삶 주목

저자는 이 책에서 화인 엘리트들의 욕망과 별도로, 이름을 남기지 못한 숱한 밑바닥 화인들의 삶이 드러나도록 애썼다. 여기서는 이를 '우유'와 '크림'으로 구분했다. 기존 연구들이 대체로 '크림'의 서사였다면, 이 책은 미분리된 '우유'로서의 화인사회를 보고자 했다. 또 기존 동남아 화인사회 연구는 이방의 중국인 이주자들이 현지의 비중국인과 어떤 관계였는지를 중시했다. 그러나 저자는 페낭이란 독특한 영국 식민지의 화인사회는 중국인과의 관계가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 주를 이뤘다고 봤다. 페낭과 페낭 화인권에서 화인사회는 실로 중국인 간의 관계가 비중국인과의 관계보다 훨씬 비중이 큰 역사를 형성했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 이 책의 차별성이다.

저자는 4년간 수차례 현지답사와, 중국과 일본의 관련 저서는 물론 영국인 식민지 행정관의 기록을 비롯한 구미 학자들의 선행 연구를 섭렵한 끝에 페라나칸의 역사에 관한 종합적 조감도를 그려냈다. 기존 연구 대부분이 단편적 주제나 특정 시기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 책은 페낭을 중심으로 말라카해협 북부를 하나의 권역으로 보고 종합적·체계적으로 연구한 저서이다. 496쪽, 2만8천원.

▷저자 강희정은

서울대에서 중국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사학회 편집위원,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ICOMOS 정회원이며, 중국과 동남아시아 미술을 문화사적 입장에서 연구하고 있다. '나라의 정화', '조선의 표상: 일제강점기 석굴암론', '지상에 내려온 천상의 미' 등의 저서가 있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