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금여석'은 마땅히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뜻으로 최영(崔營, 1317~1389)의 아버지 원직(元直)의 유언이라고 '고려사高麗史'에 전한다. 원직은 사헌규정(司憲糾正)으로 관리들을 규찰하고 풍속을 교정하는 일을 맡았다.
최영이 열다섯 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마지막 유언을 남기셨다. "재물을 탐하지 말라. 황금보기를 돌같이(視金如石)하라." 유언을 명심하고 나무쪽지에 당금여석(當金如石)이라고 새겨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 마지막 주신 말씀이라 그냥 금인 시금(視金)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 마땅히 뜻을 받드는 당금(當金)이라고 새긴 것이다.
최영은 본관이 동주(東州)이고 5대조 할아버지 유청(惟淸)은 모든 경에 통달하고 천문에도 밝았으며 왕족에게 경을 강설한 충신이었다. 키가 크고 힘이 세며 재주가 뛰어난 최영은 1354년 원(元)에서 원병을 요청하자 대호군(大護軍)으로 난군을 토평하여 대륙에 용맹을 떨치고, 후에 배원 정책으로 압록강 서쪽의 8참(站)을 수복하였다. 1358년 오예포(吾乂浦)에 침입한 왜적과 대적하여 왜선 400척을 격파했다.
1359년 홍건적(紅巾賊) 4만이 서경(西京)을 함락시키자 격퇴시키고, 1361년 다시 홍건적 10만이 개성을 함락시키자 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무찔러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다. 1371년 신돈(辛旽)의 참소로 좌천되었다가 처형되자 1373년 육도도순찰사가 되었다. 1376년 우왕 2년에 왜적이 삼남(三南·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을 침입하여 양민을 괴롭히자 홍산(鴻山)에서 무찔렀다. 패하여 돌아간 왜구들은 최영을 백수최만호(白首崔萬戶)라 하여 후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1381년 수시중(首侍中)이 되고 횡포한 염흥방·임견미(林堅味) 일당을 숙청하여 나라의 기강을 확립하였다.
최영이 훌륭한 명장이 된 데에는 평생 동안 아버지의 유언을 잊지 않고 따른 데 있다. 그는 일국의 시중에 이르렀음에도 유언인 당금여석(當金如石)을 허리춤에 차고 다니면서 관리를 규찰하고 풍속을 교정하신 아버지를 떠올리며, 그 말씀을 황금율(黃金律)로 삼았다. 나라의 으뜸인 막중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초가삼간 비좁은 집에서 불평 없이 살며 남의 왜적과 북의 오랑캐를 막아냈다. 오직 나라를 위하는 최영의 공리적인 삶이 주변 사람들의 마음에 공감되어 모두 다 그를 동기처럼 따랐다. 당시 관리들은 재물을 탐하고 가산(家産) 모으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최영은 기품이 달랐다.
이처럼 혼탁한 와중에 명(明)나라가 철령위(鐵嶺衛)의 설치를 통보하여 왔다. 철령 이북과 요동을 예속시키려 하자 요동정벌을 결심하고 평양군사를 독려, 좌군 도통사 조민수(曺敏修)와 우군 도통사 이성계로 하여금 3만 8천800명으로 요동을 정벌케 했다. 그런데 이성계와 조민수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함으로 요동정벌은 실패하였다. 회군으로 도성이 점령되자 최영도 이성계에게 잡혀 귀양 갔다가 압송되어 참수되었다. 개경 사람들은 저자의 문을 닫고 최영의 죽음에 온 백성이 슬퍼했다. 이성계는 새 왕조를 열고 6년만에 무민(武愍) 시호를 내렸다.
장군의 맑고 고매한 삶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황금보기를 돌 같이 하라'는 '당금여석'의 금언과 풀이 나지 않는 묘와 함께 애국심을 깨우쳐 주고 있다.
(사) 효창원 7위선열기념사업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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