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잘 그린 똥 그림보다 못 그린 마돈나 그림이 훨씬 낫습니다. 이유인즉 그림은 보여주기보다 뭔가 느낌을 전달해야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형태성보다는 색감의 조화에 신경을 많이 씁니다."
감각적인 그림보다 감성적인 구상회화에 몰두하면서 조각'설치 예술에서도 두루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김영환(56)의 말은 그의 미술관점을 그대로 드러낸 일종의 선언과도 같다.
유난히 긴 올해의 여름 장맛비가 바지 끝단을 흠뻑 적시던 날, 대구시 중구 대봉동에 자리한 김영환 작가의 화실을 찾았다. 200㎡ 규모의 화실은 작가가 현재까지 3년 6개월 동안 창작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화가들이 어릴 적 자신의 꿈을 밝혔을 때 대부분의 부모들이 반대 의사를 드러냈던 것과는 달리 6남매 중 다섯째인 김영환은 초·중·고 시절부터 선친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으면 미술 수업을 했다. 선친 역시 故 백태호 선생에게 사사 받았던 화가 지망생이었던 관계로 김영환은 영신고 미술부 시절 때 이미 미술대 진학을 결정했고 선친이 작업실과 물감 등을 챙겨주었다고 한다.
"고교 때 사실 사진이나 건축에 더 관심이 있었지만 미술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작업이라서 결국엔 미술을 전공하게 됐죠."
그럼에도 영남대 미술대학 회화과(83학번) 시절 김영환은 평면보다 입체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우렸다. 그의 졸업 작품 역시 입체작품인데, 대구 칠성시장에서 닭대가리 한 포대를 구입, 그 뼈를 추려내려다가 한 번 실패한 후 의과대학 다니던 친구에게 자문을 얻어 다시 한 포대를 재구매해 푹 삶은 후 포르말린에 담가 말려 하얗게 변색된 그 뼈들로 입체작품을 만들었다.
그의 작품을 본 대구의 모 화랑에서 그를 초청, 초대전을 열어주기도 했다.
"특히 대학시절 누구나 한번쯤 그러하겠지만, 삶과 미래에 대한 이야기와 운동권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막상 사실적 표현이나 대상의 단순한 재현에만 빠지는 수업방식에는 싫증이 많이 났습니다."
1989년 김영환은 졸업과 동시에 독일 유학을 떠난다. 그는 2000년 귀국 때까지 약 11년간 독일 브라운슈바익 국립미술대학을 거쳐 석사과정 이후 밟게 되는 도제식 과정인 마이스터(Meister)과정을 마치게 된다.
그의 유학 초기 독일은 통독의 기운이 왕성했고 지도교수였던 헤르만 알베르트 교수 또한 도제 교육의 대명사로 불릴 만큼 정장차림의 엄한 수업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다. 당시 독일 화단은 표현주의 색채가 강했다. 독일 표현주의 회화는 섬세한 명암과 색을 꺼리고 큼직큼직하고 밝지만 비현실적 색을 사용했고 건물을 처지거나 기울기도 했다.
이런 영향을 받은 김영환은 마이스터 과정에서 8명의 독일 아티스트들과 수업했고, 이들 9명의 동문들은 '콘벤치온'(Konvention)이란 그룹명을 갖고 독일 현지에서 다양환 미술활동을 펼쳤다.
현재 김영환이 캔버스에 추구하고 있는 템페라 기법은 그의 유학 시절이 끝나갈 무렵에 만나게 됐다.
"지도교수가 어느 날 '네 갈 길을 찾아보라'는 말을 화두처럼 던진 적이 있습니다. 그런 차에1992년 독일 동문들과 함께 이탈리아 시에나를 방문하게 됐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초 화가 지오토 디 본도네의 작품을 비롯해 시에나 대성당의 벽화, 즉 프레스코에 푹 빠지게 되면서 프레스코 제작방식인 습식 템페라와 건식 템페라 중 건식 템페라 기법을 구사하기 시작한다. 김영환은 독일에서 학사과정 때 이미 그림의 재료학에 대한 지식을 쌓은 터라 누구보다 쉽게 템페라 기법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김영환의 템페라 기법은 토끼 뼈 아교를 중탕해서 녹인 후 정제된 석회를 섞어 캔버스 생천에 6, 7번 엷게 바른다. 이 경우 너무 두껍게 바르면 균열이 생기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이런 다음에 안료에 계란 노른자를 섞고 미량의 꿀과 식초, 백반을 더한 마티에르로 그림을 그린다. 식초는 부패를 막고 백반은 곰팡이 발생을 막는 역할을 한다.
여기에 덧붙여 작가는 덧칠을 많이 할 경우 석회의 특성상 화면이 갈라지거나 색감이 탁해질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 점묘법으로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 템페라 기법에 점묘법으로 그림을 그리는 건 김영환만의 독창적 붓 터치이다. 작가는 이런 기법을 30년째 사용하고 있다.
"붓으로 점묘법을 구사하거나 나이프로 안료를 긁어내고 다시 칠하는 등을 되풀이하면서 그림을 그리다보면 원하는 색감을 얻게 됩니다."
그의 첫 공식적인 해외 개인전은 1995년 독일의 도시 렘고에서였다. 이곳서 그는1994년부터 1995년까지 레지던시를 했는데 이때 바위 동물 구름 등과 같은 자연물을 템페라 기법으로 선보였다. 국내에서는 1996년 서울 인사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는데 화면에 2~5개의 오브제를 마치 퍼즐 맞추듯 배치해 시각적 이미지를 강하게 드러냈었다.
"이 시기에는 특히 오브제의 배치와 색채의 조화에 신경을 많이 썼고 강렬한 색감보다는 서로 조화롭고 부드러운 느낌의 색채들로 이루어졌습니다."
김영환은 2000년 귀국 후 대구 맥향화랑에 3년간 전속을 하면서 구상과 비구상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화면을 대중들에게 보여주었다. 오브제는 주로 집이었다. 또 독일 유학 중 가톨릭에 귀의한 그는 화폭에 종교적 색채를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이런 까닭에 그의 그림이 누구보다 종교적인 색채를 지니게 됐다. 그에 따르면 자연물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에 천착하다보니 자연히 종교적 색채를 그림 속에 띄게 되더라는 것. 이후에 김영환은 쭉 이러한 화풍을 견지하고 있다.
글 사진 우문기 기자 pody2@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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