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고] 대구독립운동기념관, 속히 성사되길

혜신 산남의진기념사업회 회장(은혜사 기기암 주지)

혜신 산남의진기념사업회 회장·은해사 기기암 주지
혜신 산남의진기념사업회 회장·은해사 기기암 주지

지난 7월 20일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대구독립운동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발기인 대회에 참여했다. 행사장에는 독립운동 희생자 후손들과 대부분 나이 지긋한 그들의 지인들이 있었다. 나라 구하겠다고 기꺼이 희생하신 애국지사 후손이 조상들 선양작업을 손수 해야 한다는 것이 미안하게 생각됐다.

10대 경제대국을 자랑하는 한국이 100년도 지나지 않은 국가 희생자들 선양작업을 그들 후손에게 맡기는 것이 정상은 아니었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그들이 황혼의 나이에 가깝도록 노력해도 아직 걸음마 단계의 토대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이분들은 내빈석에 앉아서 박수를 받아도 부족한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산남의진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으면서 이 또한 세속 생활의 전문가들이 맡으면 좋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으나 이왕 맡았으니 최선을 다해볼 뿐이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대구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산남의진(山南義陣) 의병들을 가만히 불러본다.

강봉학(1889~1914·25세), 김선일(1880~1910·30세), 김수곡(1876~1910·31세), 김일원(1880~1910·30세), 신석존(1883~1909·26세), 오두환(1881~1909·28세), 윤흥곤(1880~1910·30세), 이석이(1879~1911·32세), 이영성(1873~1909·36세·이상 9명 교수형), 남석인(1878~1907·29세·옥사).

이런 통한의 역사 현장인 대구형무소는 흔적 없이 사라졌다. 안타깝게도 우리 손으로 없애버렸다. 순국자 평균연령이 29세라 놀랍다. 나라를 위해 재산과 목숨을 버렸다. 이런 정신을 후세들이 볼 수 있는 장이 필요하다. 이번 행사에는 독립정신계승사업회 우대현 상임대표와 제8대 독립기념관 관장을 지낸 김능진 추진위원장 등 각계각층에서 모였고 산남의진기념사업회 회장으로 본인도 힘을 보태고자 자리했다.

산남의진은 1906년 3월 고종 황제의 밀명을 받은 정환직이 아들 정용기와 영천에서 일으킨 의병조직으로, 주로 영천·영일·청송 등의 경상도 동북부를 중심으로 의성·군위 등 경북도 내륙과 경남도 일부 등을 거점으로 활동했다. 영남에서 관동지방으로 북상, 그곳 의병부대와 서울로 진격하려던 목표는 좌절됐지만 후일 13도 의병연합부대의 결성과 서울진공작전의 단초가 됐다.

당시 정용기를 대장으로 삼아 의병진을 꾸렸다. 정용기가 4월 관군에 체포되자 이한구가 지휘를 맡았으나, 패전하자 7월 일단 의진을 해산했다. 이 해 9월 석방된 정용기는 1907년 산남의진을 재건했다. 재건 산남의진은 일본군을 격파하고, 우재룡(禹在龍) 지휘의 해산 군인들과 합류했다. 산남의진 선봉장 우재룡은 우대현 상임대표의 선친이다. 산남의진과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의 연결고리가 현재까지 이어져 인연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1대 의병대장 정용기가 1907년 9월 포항 입암전투에서 전사하자 아버지 정환직은 2대 의병대장으로 항전하다 1907년 11월 일제에 붙잡혀 영천 조양각 둔치에서 총살됐다. 산남의진 참여자 여럿이 전사하고 대구감옥에서도 10명이 순국했다. 이제 대구형무소도 재현되면 산남의진 의병 희생자 위령 장소도 갖게 돼 산남의진기념사업회로서는 반가운 일이다.

기념관 건립 활동에 산남의진기념사업회도 적극 나서 도울 생각이다. 기념관이 건립되는 날을 기대하니 벌써 가슴이 뛴다. 함께 분발할 따름이며 미래지향적인 대구독립운동 역사관이 속히 성사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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