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풍등(排風藤)이 있던 자리
차영호(1954~)
폐교 하늘에 구름 한 장 떠 있다
풍금소리 들은 지 오래 되었다 그치?
교실 앞마당 웃자란 나무들이 부스럼딱지를
꼬질꼬질한 빤스처럼 헤집어 보이며
열중 쉬어, 차려를 해본다
건너편 산도 열중 쉬어, 차려 따라하며
그늘을 지운다
배풍등 빨간 목걸이를 건 구름
시은아, 너만큼 모가지가 길다
나훈아의 '분교'란 노래가 생각난다. "늑목 밑에 버려진 농구공/ 측백나무 울타리 너머로/ 선생님의 손풍금 소리 지금도 들리네/ 지붕도 없는 추녀 끝에는/ 녹슨 종이 눈을 감고 있는데/ 다들 어디서 그 소리를 듣느뇨/ 추억 찾아 옛날로 가면/ 몽당연필 같은 지난 세월이 나를 오라 부르네." 뭐 얼추 이런 가사다. 고향 친구 두엇과 어울려 가끔 술잔을 기울이고 노래방에 가는데 그러면 친구 하나가 어김없이 나한테 이 노래를 불러달라고 한다. 내가 저보다 감정을 더 잘 잡는다나 뭐라나. 거참!
'배풍등'(排風藤)은 어떤 식물일까? 알면 어떻고 모르면 뭐 어떤가. 중요한 것은 시 속의 학교는 폐교이고 그 '폐교 하늘에 구름 한 장이 떠 있다'는 것. 배풍등은 아직도 그 학교 그 교정 어딘가에서 넝쿨을 뻗고 꽃을 피우고 있다는 것. '교실 앞마당 웃자란 나무들도/ 건너편 산도/ 열중 쉬어, 차려'를 한다는 것은 나무와 산들마저도 그 시절 그 아이들이 그리워 그 시절 그 아이들 흉내를 낸다는 말. '배풍등 빨간 목걸이를 건 구름'이라니! 목이 가늘고 긴 '시은'이란 아이는 유독 예쁜 기억 속의 제자이기도 하지만 폐교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시인 자신이기도 할 터.
그나저나 포항 어느 교정 소나무가 멋진 학교에서 열리던 푸른시 동인들의 여름시인학교는 어떻게 됐을까. 왁자지껄, 포항 시인들은 아직도 그 순수와 열정을 간직하고 있을까? 차영호 시인의 '배풍등이 있던 자리'는 '열중 쉬어, 차려' 수동적이 아니고 능동적이다. 코로나 때문에 동창회가 모조리 취소된 올해. 흰 구름 올려다보기 좋은 가을이 오고 추석이 오면 내 어릴 적 모교를 한번 다녀오는 것도 괜찮겠다.

시인 유홍준:1998년 『시와반시』로 등단. 시집 『喪家에 모인 구두들』 『나는, 웃는다』 『저녁의 슬하』 『북천-까마귀』 『너의 이름을 모른다는 건 축복』이 있다. 시작문학상 이형기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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