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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칼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의 상소문

정창룡 논설주간
'시무 7조 상소문' 국민청원.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
정창룡 논설주간

부질없는 말이 되었지만 2017년 5월 10일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엔 "~(하)겠습니다"란 말이 60차례 등장한다. 나라를 위해 이런저런 일을 '하겠다'는 약속이 단문 단문 폭포수처럼 이어졌다. '연설문'은 명문장이었다. 대통령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열정으로 뜨겁다' 했다. 이를 듣는 국민들의 가슴도 뜨거웠다.

그럼에도 부질없다고 한 것은 모두가 식언(食言)이 되어서다. 몇 가지만 꼽아본다.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을 최대한 나누겠습니다"던 약속. 최장집 명예교수는 문재인 정부 3년 '대통령의 권한'은 확장돼 왔고, '법의 지배'는 위협받았다는 말로 이를 일축했다.

"청와대에서 나와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열겠다"던 다짐도 이내 버려졌다. 그러고도 최근 수도 이전 주장을 들고나왔다가 "대통령 집무실도 광화문으로 옮기지 못한 주제에"라는 핀잔을 들었다. "주요 사안은 직접 언론에 브리핑하겠다"고 한 것은 허언이었다. 국민들은 궁금한 점이 많다. 나라 경제는 상처투성이고 국민 삶은 힘겨운데 '기적 같은 경제 선방을 하고 있다'는 인식은 어디서 나왔는가. 코로나 전쟁의 최일선에 선 의사들의 등을 돌리게 한 공공의대 정책은 갑자기 왜 튀어나왔나. '부동산 정책은 자신 있다'던 그 자신감은 어디서 온 것일까. 대통령은 한 번도 이런 현안에 대해 언론에 직접 설명한 적이 없다.

"권력 기관은 정치로부터 완전히 독립시키겠다"란 말 역시 토사구팽이 됐다. 국민들은 '살아 있는 권력'을 수사한 윤석열의 검찰이 몇 차례 인사를 통해 어떻게 정치권력의 애완견으로 전락하는지를 똑똑히 지켜봤다.

"특권과 반칙이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대목은 조국 전 수석과 맞물리면서 웃음거리가 됐다. 대통령은 그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고 했다. 이는 '특권과 반칙이 없는 세상'은 '내 편에는 적용하지 않는다'는 메시지였다.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말도 그렇게 공허해졌다. 더불어민주당 조응천 의원조차 "언제부턴가 우리 편과 저 편을 가르기 시작했고 이중 잣대로 가늠했다"는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 시중엔 대통령이 취임사 중 지킨 유일한 약속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든 것이라는 역설적 해석이 회자된다.

이러니 나라 걱정을 하는 국민들이 많아졌다. 지난주엔 스스로를 '먼지'라 칭한 이(진인 조은산)가 대통령에게 올린 시무 7조 상소문이 화제였다. 상소문 역시 그 운율과 은유, 날카로운 관찰과 분석이 돋보이는 명문장의 연속이었다. "실정의 책임을 폐위된 선황에게 떠밀며 실패한 정책을 그보다 더한 우책으로 덮어 백성들을 우롱하니 그 꼴이 점입가경"이라 했다. "정책은 난무하나 결과는 전무하다"고 꼬집은 대목은 위정자로선 뼈아픈 대목이다. '감성보다 이성을 중히 여기는 정책' '명분보다 실리를 중히 여긴 외교'를 펼치라는 고언도 잊지 않았다.

조선조는 상소의 시대였다. 각계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상소가 올라왔다. 세종 같은 현군은 사소한 상소도 소홀히 다루지 않았다. 연산군 같은 폭군은 상소 기능을 없애려 했다. 선조는 왜적이 쳐들어올 것에 대비해야 한다는 상소를 무시했다가 무능한 왕이 됐다.

진인의 상소문 청원인이 30일 현재 40만 명에 육박한다. 옛 상소엔 임금이 직접 답했다. 문 대통령도 직접 답하기를 기대한다. 이는 대통령이 한 문장 한 문장을 직접 읽고 의미를 반추할 기회를 가졌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이 상소문에 온 국민이 폭발적으로 반응한 것을 허투루 여기지 말았으면 한다. 대통령이 더 이상 내 편 말만 듣고 접하며 나라를 이끌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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