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임기를 1년 남겨 두고 정권을 내던졌다. 이유는 2007년의 1차 사임 때와 마찬가지로 건강 문제라고 하나 석연치 않다. 아베는 지난 6월 코로나 재확산 이후 지방정부에 대책을 미루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내각부는 8월 17일 올해의 2분기 GDP 성장률이 –27.8%를 기록했다고 발표해 아베노믹스의 취약성을 드러냈다. 정권 운영에 대한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의욕을 상실한 듯 아베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건강 이상설이 나온 것도 이 시점이다.
2012년 말 성립한 아베 정권은 일본 헌정 사상 가장 긴 7년 8개월간 존속했다. 민주국가에서 장기 집권은 부자연스럽고 바람직하지 않다. 사임 발표 직후 서일본(西日本)신문사의 긴급 여론조사에서는 아베 정권에 대한 부정 평가(50%)가 긍정 평가(30%)를 앞섰다. 언론도 입이 터졌다. "오랜 기간 권력 유지에는 성공했지만 정책이나 정치 수법의 면에서는 부정적 유산을 쌓아 올렸으며"(마이니치신문), "상처 입은 민주주의를 다시 세워야 한다"(아사히신문)고 평가했다. 아베는 임기 중 금융 완화를 축으로 아베노믹스를 추진했고, 해석개헌을 통해 집단적 자위권 도입 등 전쟁 관련 법제를 완비했다. 세계적 투자 전문가 짐 로저스는 "아베가 일본을 망쳤다고 깨닫는 날이 올 것이다"고 그의 경제정책을 혹평했다.('세계에서 가장 자극적인 나라') 시민사회는 "전쟁을 하고 싶으냐"며 전쟁 관련법을 비판했다.
아베 총리의 사임 기자회견은 한국에 실시간으로 중계되었다. 어느 정치인은 페이스북에 "만감이 교차한다. 그동안 어지간하게 한국을 힘들게 했다"는 감상을 남겼다. 아베는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한국인에게 가장 깊이 각인된 정치인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 식민지화의 원흉이며, 아베는 식민지 시대의 범죄를 부정하는 '아름다운 일본'을 추구하며 보수 우경화의 길을 걸었다. 위안부는 없었으며, 1965년의 청구권 협정으로 모든 배상 문제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불행했던 과거사를 직시하는 것을 자학사관이라 비판하고, 일본 국민에게 자긍사관을 강요했다. 한일 갈등 심화의 도화선이 된 2018년 대법원의 강제동원 배상판결에 대해서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한국, 국제법 위반이라 비난했다. 일본 사회의 혐한(嫌韓) 무드를 더욱 부추긴 것이다.
3·1운동과 임시정부에서 민족 정통성의 근간을 찾는 한국, 특히 문재인 정부에서는 아베 정권과의 타협이나 양보는 어려웠다. 대법원 판결에 일본이 답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명제라며 정면 대결을 택했다. 급기야 아베는 혐한 무드를 배경으로 보복성 수출규제 조치를 취하고, 보이지 않게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도 방해했다. '노 재팬', '노 아베' 붐과 함께 한일 관계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듯했다.
문재인 정부나 아베 정권 가운데 어느 한쪽이 없어지지 않으면 한일 관계는 회복이 어려운 듯했는데, 아베 정권이 사라졌다. 한일 관계도 회복될까. 아베 정권하에서 강고해진 혐한 분위기 속에서 새 정권이 한국과의 관계 개선을 외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이 때문에 다소 시간이 걸릴 것이나, 변화의 모멘텀은 있을 것이다. 포스트 아베를 누가 이어갈 것이냐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총리 비서실장 겸 정부 대변인 격),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때 외상이었던 기시다 후미오, 아베 총리의 정치적 라이벌인 이시바 시게루 등이 아베의 후임자로 거론된다. 아베는 기시다에게 신뢰를 보내는 듯했으나, 스가를 정책 계승자로 여기고 있다는 관측이다. 아베가 새 총리 선출 때까지 직을 유지하는 것은 이시바에게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국민 선호도가 가장 높은 이시바보다 스가의 가능성을 점치는 이유이다.
아베 정권의 축을 담당했던 스가나 기시다가 총리가 되면 탈아베에 한계는 있겠으나 장기 집권의 피로감이 누적된 아베 정치를 답습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아베의 대척점에 있는 이시바는 아베의 노선에 변화를 줄 가능성이 있다. 아무튼 아베 정권은 끝났다. 누가 아베의 뒤를 잇든 비정상적인 한일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암중모색이 시작될 것이다. 아베 없는 한일 관계를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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