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종민의 나무 오디세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 무색한 배롱나무

1. 대구 달성 하목정 마루에서 바라본 배롱나무.
1. 대구 달성 하목정 마루에서 바라본 배롱나무.
이종민 선임기자
이종민 선임기자

한여름의 이글거리는 햇살에도 지칠 줄 모르고 선홍색 꽃이 만발하는 나무가 바로 배롱나무다. 올해 7, 8월 유난히 길고 '역대급' 장맛비에 꽃잎이 다 떨어지는 듯했으나 땡볕 아래 다시 화려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열흘을 붉게 피는 꽃이 없다지만 100일 동안 피고 지기를 반복하며 여름을 나는 배롱나무꽃을 백일홍이라 부른다. '백일홍나무'로 부르다가 '배기롱나무'로 변하고 '배롱나무'로 이름이 굳었다. 멕시코가 원산인 화초 백일홍과 구분하기 위해 조경 현장에서는 배롱나무꽃을 '목백일홍'으로 부르며, 도종환의 시 '목백일홍' 역시 배롱나무를 말한다.

서원·사찰·사당·재실에 고목 많아

배롱나무가 장관인 대구의 명소는 동구 신숭겸 장군 유적지, 달성 현풍 대리 현풍 곽씨 재실인 추보당과 하빈에 있는 하목정을 손꼽는다. 특히 추보당 뒤란에는 수령 400년이 넘는 고목이 지키고 있고 하목정의 뒤란과 불천위 사당 앞에도 오래된 나무들이 도열해 있다. 도화(道花)가 백일홍인 경상북도에서도 사찰이나 서원에 오래된 배롱나무가 많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경주 서출지와 기림사, 안동 병산서원, 상주 옥동서원 등에는 수백 년의 세월을 이긴 배롱나무가 아름다운 꽃으로 뭇사람들의 시선을 유혹하고 있다.

조선 후기 유박이 쓴 원예서 「화암수록」에는 백일홍의 꽃말이 '속우'(俗友·속된 벗)다. 일반적인 꽃말은 '떠나간 벗을 그리워함'이다. 옛 선비들은 서원의 백일홍을 바라보면서 다정한 벗을 추억했을지도 모른다. 절에 배롱나무가 많은 연유는 반질반질하고 얇은 껍질로 겨울을 나듯이 수행하는 스님들도 욕망을 훌훌 벗고 정진하라는 뜻이거나 불법(佛法)에 환한 꽃을 공양하려는 불심 때문으로 추측된다.

대구 달성군 현풍읍 대리 현풍 곽씨 재실인 추보당 뒤란에 수령 400년 넘은 배롱나무꽃이 활짝 피어 있다.
대구 달성군 현풍읍 대리 현풍 곽씨 재실인 추보당 뒤란에 수령 400년 넘은 배롱나무꽃이 활짝 피어 있다.

더운 여름 백일홍의 왕성한 생리를 시샘하고 소나무의 높은 격조를 빗댄 한시가 흥미롭다.

花無十日紅(화무십일홍·꽃이 아름답다 한들 열흘을 가지 못하는데)

爾獨百日紅(이독백일홍·너는 어찌 100일을 붉게 피나)

莫誇百日紅(막과백일홍·100일 길다고 자랑마라)

巖上千年松(암상천년송·바위 위에 천 년 푸른 소나무가 있다)

간지럼 타는 나무? 글쎄!

조선시대 강희안이 쓴 최초의 원예서인 「양화소록」에는 "격물론(格物論)에 자미화(紫薇花)를 파양화(怕痒花)라 하는데 몸뚱이가 매끄럽고 윤기가 흐르며, 높이가 한 길 넘고, 자줏빛이고 주름진 꽃잎이 예쁜 꽃받침에 바싹 들러붙고, 붉은 줄기에 잎이 맞대어 핀다"고 했다. 옥황상제의 정원인 자미원에 피는 자미화가 백일홍이라는 전설도, 아들의 여자였던 양귀비를 사랑한 당나라 현종은 자미화를 너무 좋아해서 백일홍이 많은 중서성 이름을 자미성으로 바꾸게 했다는 역사도 배롱나무만이 갖는 과거사다. 중국에서는 배롱나무를 '간지럼 타는 나무'라는 뜻으로 '파양수'(怕痒樹)라고도 한다. 가끔 호기심에 매끈한 배롱나무 줄기를 문지르거나 긁는 사람이 보인다. 그러나 나무는 신경세포가 없어 간지럼을 타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들이 간질이면 나무는 가만히 있는데 지나가는 바람에 가지나 잎이 흔들릴 뿐이다. 재미로 하는 행동이지만 엉뚱한 데 긁으면 생채기나 부스럼만 생긴다. 세상사나 나무도 마찬가지다.

이종민 선임기자 chungham@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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