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대기실에서 비명 소리가 나서 깜짝 놀라 뛰어나갔더니, 젊은 아가씨가 벌벌 떨고 있었다. 거미가 지나갔단다. 물렸냐고 물었더니 그러진 않았단다. 과거 물린 적이 있었냐니까 그런 적도 없었단다. 그냥 생긴 것이 징그러우니까 약을 쳐서 없애 달라고 했다. 따라온 친구는 개미도 무섭다고 했다. 병원이 한옥이라 거미나 개미 같은 벌레는 자주 보이는 일이다.
흙을 만지면서 인식이 가장 바뀐 것은 지렁이다. 어린 시절 지렁이는 나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학교 자연시간에 지렁이는 흙에 좋은 일을 많이 하는 보석 같은 존재라고 배웠지만 보기만 해도 온몸에 전율이 생겼다. 비가 오면 땅속의 지렁이는 숨을 쉬지 못하니까 밖으로 나온다. 시멘트 포장이 안 된 흙으로 덮인 골목은 많은 지렁이가 돌아다녔다. 우리 집은 골목 안에 있었다. 비가 올 때마다 5형제 중 막내는 형들 명령에 따라 미리 나가서 골목에 소금을 뿌렸다. 우리는 눈을 감고 죽은 지렁이를 뛰어넘으며 학교로 뛰어갔다. 하지만 아파트 생활을 하고 흙 볼일도 없어지면서 지렁이는 내 기억에서 사라졌다.
나는 채식을 하면서 마당 한구석에 음식 쓰레기를 퇴비로 만들고 있다. 제대로 퇴비를 만들려면 지렁이를 키우면 된다고 누군가 권유했지만 유쾌하지 않은 기억 때문에 그냥 두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지렁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땅에서 유랑하는 지렁이라고 했다. 주위가 온통 시멘트로 덮여 있는 도심 한가운데 어디서 유랑하다가 여기까지 왔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음식 쓰레기를 퇴비로 하는데 키우는 지렁이는 낚시에 쓰이는 붉은 지렁이다. 작은 몸집을 가졌지만 번식도 잘하고 먹성도 왕성하다. 하지만 유랑하는 지렁이는 크기가 손가락만하게 굵다. 처음에는 무서웠다. 그런데 내가 필요에 의해서 자주 보고 시간도 지나자 어느 순간 징그럽지가 않았다. 이제는 손으로도 만진다. 길을 가다가 지렁이가 시멘트 바닥에 나와 있으면 흙이 있는 곳으로 정성스럽게 옮겨주는 버릇이 생겼다. 말도 붙인다. "너 왜 이렇게 나와 있니? 안전한 곳으로 가자."
텃밭의 돌을 치우면 돌 밑에 숨어 있던 많은 벌레들이 깜짝 놀라서 난리가 난다. 벌레들을 놀라게 해서 미안하지만 지렁이를 보면 웃음이 난다. 느린 지렁이도 급한 상황에서는 빠르게 땅속으로 몸을 숨긴다. 학창 시절 항상 지각만 하다가 식당에는 가장 빨리 나타나던 친구가 생각났다.
지렁이에 관심이 생기자 지렁이를 키우고 체험하는 농장에 간 적이 있다. 유치원 아이들이 견학 와서 놀고 있었다. 땅에 돌아다니는 지렁이를 가만히 쳐다보는 아이, 손바닥에 올려서 관찰하는 아이, 하지만 징그럽다고 도망가는 아이는 없었다. 어른들은 무서워하지만 편견 없는 아이들은 그냥 신기한 벌레로 보고 지렁이를 대한다고 했다. 지렁이 전문가는 유치원에 지렁이 밭을 만들어 음식 쓰레기도 처리하고 지렁이와 친숙하게 지내도록 교육시키고 싶어서 평생 이런 일을 하는데, 어른들 반대로 이 운동이 널리 퍼져 나가지 않음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흙을 만지고 벌레들을 관찰하는 것이 조기 영어 교육시키는 것보다 중요할 수도 있겠다. 현대 사회는 여러 가지 편견 때문에 종교적·인종적 갈등, 이념적·국가 간 대립이 심각하다. 자연에 대한 경외감도 사라진 지 오래다. 자연을 사랑하고 주위를 넓게 보면서 이웃 사람들을 이해하고 관용하라고 얘기하고 있지만 실제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간다. 말로만 얘기할 것이 아니다. 우선 아이들이 땅을 만지고 벌레를 관찰하는 것이 깨닫고 실천하는 중요한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임재양 임재양외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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