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00주년 행사가 하나 있다. 1920년 10월의 청산리대첩이다. 청산리대첩의 주인공으로, 1930년 1월 만 40세에 짧은 삶을 마친 백야(白冶) 김좌진 장군의 서거 90주년을 기리는 행사도 있다. 둘 모두 마땅히 기릴 만하고, 그래도 좋을 일이다.
백야의 고향인 충남 홍성 등 여러 곳에서 이미 그런 일들을 선보였고 또 준비되고 있다. 서울의 한 대기업은 지난 7월 기념 메달을 만들고, 이달 12일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은 청소년 교재로 만든 '청산리의 영웅 김좌진'도 발간했다. 경북독립운동기념관은 지난 8월부터 전시회도 열었으나 코로나로 당분간 중단하고 있다. 대구는 독립운동사에서 어느 곳과 달리 백야와 남다른 인연이 많아 그를 한번 떠올릴 만하다.
백야. 일찍 개화에 눈을 떠 어머니와 집안의 반대에도 집안의 30명 넘는 종의 노비 문서를 불사르고 2천 석(石)을 거두던 토지를 소작인에게 나눠준 일을 실천했던 그였다. 그러나 그가 바랐던 새로운 개화 세상은 오지 않았다. 나라가 망하자 조국을 되찾겠다며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지만 되레 그의 삶은 한 동포 암살범의 흉탄으로 끝났다.
백야는 1915년 대구 달성공원에서 출발한, 1910년대 최대 항일무장단체 대한광복회의 만주사령관으로 독립자금을 받았고, 망명 생활을 했던 인물이다. 그는 청산리전투와 같은 독립전쟁의 전투에서도 살아남았다. 그런데 바로 그런 그가 이념과 사상의 차이로, 공산주의 단체 소속 청년 동포가 쏜 흉탄에 쓰러졌으니 어찌 한스럽지 않은가.
대한광복회가 추구한 공화주의에 민족주의 사상을 믿은 그를 옛 러시아에서 시작된 공산당의 주의 주장을 따르는 세력은 그냥 두지 않았다. 독립운동의 같은 배를 탔으나 광복의 순간까지 함께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사상과 이념 갈등에 독립전쟁의 영웅마저 없애야만 했던, 당시의 사상과 진영의 대결은 우리 역사의 악몽이었다.
청산리대첩 100년과 백야 서거 90주년을 맞아 이런 악몽의 어두운 역사의 비극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동안 혹시 우리는 서로 자기들만 믿고 따르는 사상과 이념을 좇느라 다른 진영의 큰 인물을 잃은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았는가. 청산리대첩 100년과 백야 서거 90년을 대구에서 한번 되돌아보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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