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지 갓 보름여가 지난 시기인 2017년 5월 26일 낮 청와대 본관. 문재인 정부인지, 박근혜 정부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현장이 나타났다. 탄핵 정국으로 인수위원회 체제도 없이 '문재인 내각'을 꾸리지 못한 채 같은 달 10일 청와대로 들어온 문재인 대통령이 이날 박근혜 정부의 기존 국무위원들과 오찬 간담회를 가진 것이다.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비롯해 공석 상태였던 법무·문체부 장관을 제외하고는 모든 국무위원이 참석했다. 지금 대구교육감을 하는 강은희 당시 여성가족부 장관도 보였다.
"참여정부 출범 직전의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그때까지 단일 화재 사고로서는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난 사건이었습니다. 남북 대치 상황 속에서 남북 간의 군사적 충돌로 인한 사상자 숫자보다 훨씬 많은 숫자였거든요. 그것을 보면서 국방 안보도 중요하지만 국민들의 안전을 지키는 것도 국방 안보 못지않게 중요하겠다라는 포괄적 안보 관념을 가졌습니다. 청와대가 컨트롤타워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청와대에 위기관리센터를 두고 여러 위기관리 매뉴얼을 만들었습니다."
문 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표(票) 인심이 야박하기 그지없는 대구 얘기를 꺼내들었다. 자신이 청와대 참모로 일했던 노무현 정부 때 대구지하철 참사를 교훈 삼아 청와대 위기관리센터를 만들었지만 정권이 바뀌고 나니 위기관리센터는 없어지고, 위기관리 매뉴얼도 사용되지 않았다는 '정권 간 불연속성'을 지적한 것이었다.
그러고는 "국정 운영의 연속성에 대해 많이 도와달라"고 문 대통령은 부탁했다. 문 대통령은 노무현 정부 시절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며 "청와대에서 거의 4년가량 민정수석, 시민사회수석, 비서실장을 한 적이 있었는데 궁금할 때마다 앞의 김대중 정부 등 관계자들에게 물어보곤 했다"고 밝혔다. "앞의 정부에서 겪었던 여러 가지 경험들이나 성찰을 다음 정부에 이어주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도 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찬 마지막에 "정권은 유한하나, 조국은 영원하다"는 발언도 내놨다. 기자는 그날 헌정 사상 유일하게 국정 핵심 기관을 경험한 뒤 대통령으로 돌아온 문 대통령의 발언을 되뇌어봤다. 그의 '살아있는 경험'이 전임 정권의 실패 사례를 반복하지 않도록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자의 예상처럼 문 대통령의 국무위원 오찬 즈음에 발표된 여론조사(한국갤럽)에서는 문 대통령이 향후 5년 동안 잘할 것이라는 긍정 비율이 88%를 쏘아올렸다. 전임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 3주 차 같은 내용 여론조사 긍정 지지율은 70%에 머물렀었다.
요즘 청와대를 보면서 기자는 "전임 정부에 열심히 묻겠다"던 문 대통령의 말이 허언(虛言)이었다는 의심을 한다. '적폐'라는 말 한마디로 전임 정부의 업적은 바닥으로 나뒹굴어야 했다.
"성찰하겠다"던 문 대통령의 다짐은 어디로 갔나? 최근 추미애 법무부 장관 아들 병역을 둘러싼 논란 과정에서 문재인 정부의 간판이었던 '정의와 공정'은 형해화(形骸化)됐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에 불과하건만, 적폐 청산을 앞세우며 도덕과 윤리 독점 시대까지 열었던 문재인 정부는 정작 구멍 뚫린 도덕과 윤리가 탄로나면 "법적 하자는 없지 않느냐"며 정의로운 통치자가 아닌 법전을 든 변호인으로 돌변했다.
문 대통령은 "정권은 유한하고 조국은 영원하다"고 했다. '군대 휴가? 전화·카톡으로도 가능' 등 추 장관 사태에서 집권 세력이 내놓은 황당 발언을 들어보면 유한이 영원에게 덤벼드는 모양새다. 덤벼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집권 세력만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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