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그립습니다] 박인만·윤만 씨 부친 故 박운식 씨

2015년 한 여름 박인만 씨가 동생, 아버지 박운식(가운데) 씨와 함께 나선 산책길에 찍은 사진. 가족제공.
2015년 한 여름 박인만 씨가 동생, 아버지 박운식(가운데) 씨와 함께 나선 산책길에 찍은 사진. 가족제공.

'긴 병에 효자 없다'라는 말 들어 보셨지요. 저는 제가 긴 병에도 효자로 살 거로 생각했습니다. 저에게 해당하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했었지요. 아버지가 전립선암 치료를 시작한 지 2년 즈음 되던 어느 날, 위에서도 암이 발견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깊은 한숨을 쉬었습니다.

"야야, 나도 힘들지만, 너희도 힘들겠구나" 하시더니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이셨습니다.

저 역시 '아. 내가 뭘 잘못했나?' 싶어 자책이 되었습니다.

가족 모두 말을 잃고 있었습니다. 먼저 찾아온 전립선암을 친구라 생각하고 치료하는 중에 한 번 더 당한 일이라 크게 낙심했습니다. 아버지는 위의 삼 분의 일을 잘라내셔야 했습니다. 위암 수술 후 2년이 채 안 되어 암은 방광에도 전이됐습니다. 이제 식구들은 낙심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날마다 마주하는 암의 통증은 마약성 통증 치료제를 사용해도 견디기 어려울 만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고통을 온전히 겪어야 하는 사람은 아버지였습니다. 여윌 대로 여윈 모습은 저의 마음을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고통을 마주하는 시간이면 일그러지는 아버지 표정을 보고, 가느다랗게 떨리며 앓는 소리를 듣고 있지만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시간에 맞춰 드리는 진통제와 가슴에 붙이는 통증 패치를 바꿔드리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마음이 큰 바위처럼 다가왔습니다. 아버지는 날마다 만나는 고통을 너무 힘들어하고, 사실 돌보는 식구들과 저도 지쳐갔습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속으로 '포기하면 안 돼, 그런 마음 가지면 안 돼'라고 수십번 반복하고 지내왔습니다.

'나 역시 가야 할 길. 인생이라는 소풍을 마치는, 기꺼이 마무리해야 하는 그날이 올 것이다. 그때 오늘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되겠지. 다가올 그 날 내 모습이 어떨지 모르지만, 식구들과 헤어지며 숨 거두기 직전까지 삶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고통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견뎌 내며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 아버지가 직접 보여 주고 계신 거다.' '그래. 아버지의 고통은 나 때문이야, 나와 우리 식구들을 위해 고통을 견뎌내고 계신 거야'라는 이 생각을 동생들과 어머니와도 나누었습니다. 아버지의 긴 병은 아들을 위한 마지막 희생이셨습니다. 아버지 육신의 고통이 없었다면 아버지의 인내와 용기를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기꺼이 희생을 받아들이셨던 이유는 잠깐의 고통 이후에 다가오는 사랑의 힘을 아시고 물려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박운식(왼쪽) 씨가 1957년 결혼 직전 부인과 함께 찍은 사진. 가족제공.
박운식(왼쪽) 씨가 1957년 결혼 직전 부인과 함께 찍은 사진. 가족제공.

세월이 지날수록 그리움이 커져오는 요즘 막냇동생이 아버지에게 부치는 편지입니다.

요즈음 당신의 부재가 더욱 커 보입니다.
세 종류의 암과 7년간 싸우신 후 마지막 떠나시기 전 당신을 둘러싼 모든 가족들에게 보이신 미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제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인생은 마냥 즐거운 곳이라는 미소가 아닌 모진 세월과 병에 결코 굴복하지 않은 승리자의 미소였음을 이제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그 모진 세월을 어떻게 견디셨나요. 어떻게 그 사나운 폭풍 한 복판을 그처럼 말없이 걸어가실 수 있었나요? 어떻게 그 협착한 길을 그렇게 자연스럽게 걸어가실 수 있었나요? 저로서는 그 때 당신이 맞으시는 바람이 폭풍인지도, 당신이 걸으시는 길이 그토록 좁고 협착한 길인지도, 당신이 사신 세월이 그토록 모진지도 몰랐습니다. 당신은 아무 말씀 없이 그냥 견디셨고 그냥 걸으셨고 그냥 사셨습니다.

그걸 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다 걸으신 그 길, 그 위에 남은 발자국마저 바람에 날려 자꾸 지워져만 가는 그 길에 제가 서있게 된 지금에야 그걸 아는 저를 용서해 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의 부재가 나의 현실이 된 이제야 당신의 말이 들리는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하지만 당신의 그 견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행복한 꿈을 마음껏 꿀 수 있었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신의 길을 찾아 갈 수 있었는지 꼭 말해 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견디면 남이 길을 찾게 된다는 것, 이것이 당신이 말없이 사신 당신의 인생으로 제게 말하신 무언의 말씀이십니다.

아버지(박운식)를 사랑하는 아들 인만('다시 태어나도 제 부모님이 돼 주실 수 있나요? 저자)·윤만 올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매일신문이 유명을 달리하신 지역 사회의 가족들을 위한 추모관 [그립습니다]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가족들의 귀중한 사연을 전하실 분들은 아래 링크를 통해 신청서를 작성하시거나 연락처로 담당 기자에게 연락주시면 됩니다.

▷추모관 연재물 페이지 : http://naver.me/5Hvc7n3P

▷이메일: tong@imaeil.com

▷사연 신청 주소: http://a.imaeil.com/ev3/Thememory/longletter.html

▷전화: 053-251-1580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